구약강해/시편서 강해

(시편6-9편)영혼의 찬양

이요나 2007. 2. 26. 11:06

(시편6-9편)영혼의 찬양

 

우리는 지난 주에 시편 1장부터 5장에서 하나님의 복에 대하여 공부했습니다. 물론 시편기자가 그렇게 묶어서 기록한 것은 아닙니다만 큰 흐름을 따라서 그렇게 묶어서 살펴본 것입니다. 

 

시편 1장에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지 말아야 할 세 가지와 필히 해야 할 일 두 가지에 대하여 기록되었습니다. 시편 첫 장에 이러한 내용이 기록된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삶 속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겠습니다.

 

또한 2장에는 믿음의 중심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통치적 축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지배자들이 이를 끊으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 세상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과 예정 가운데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3장은 대적으로부터의 구원의 복에 대하여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서 대적이란 우리 영혼을 노리는 악한 자들을 말합니다. 또한 시편 4장은 택하심의 복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택함을 받은 자들은 오직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뢰해야 할 것입니다.

 

시편 5장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전의 복에 대하여 기록되었습니다. 시편기자는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 노래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주를 높이고 예배할 성전을 주신 것이 그 얼마나 큰 복인지 성도들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오늘은 시편 6장부터 9자까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이 부분은 주의 이름과 영혼에 관한 찬미와 감사의 노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오직 주를 믿는 자들만이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기쁨이며 감사의 찬양입니다.

 

-시편 6장  고통하는 영혼-

(시6:4)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

 

사람이 자기의 영혼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흥미롭게도 시편의 가장 큰 특징을 꼽으라면 역시 영혼의 각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혼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할 때 그의 형상과 그 모양대로 지으심의 근본이 되는 토대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은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에게 영혼이 없다면 우리는 육신의 만족을 위해 살아가는 짐승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윤리와 도덕을 상실한 체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켜 짐승 같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전도자는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하게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도다(전3:19) 기록하였고 이는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사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전3:18)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 땅에 호흡 있는 자가 자기를 높이고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전도자는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하였으니 이는 인간이 창조로부터 짐승과 달리 지으심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영혼에 관하여 말하건 데 그 오묘함의 비밀에 대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은 영혼이 하나님의 신비 속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속성에 대하여 말하는 것과 같아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지혜를 더해갈 때 그 영혼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3:11) 기록하였습니다.

 

다윗은 6장 1절에서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하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시편기자는 6편을 기록하며 현악으로 스미닛에 맞춘노래라 주석하였습니다. 여기서 스미닛은 옥타브를 의미하는 것으로 아주 애절함을 호소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기쁨의 승전을 알릴 때에는 나팔을 불게 됩니다. 그러나 가슴으로부터 끓어 오르는 애통함은 옥타브를 뛰어 넘는 현악기 선율에서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6편은 애간장이 녹아 내리는 노래라고 하겠습니다.

 

다윗은 2절에서 여호와여 내가 수척 하였사오니 긍휼이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외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자신의 문제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육체의 고통이 아니라 영혼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죽음을 목전에 둔 영혼의 고통을 받아 본 일이 있는지요? 만약 이것이 육체의 고통이라면 다른 방편으로 이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람에 꺼져가는 등불처럼 영혼이 대적으로부터 압박을 받을 때 그 영혼의 창조자이며 주관자이신 여호와를 떠나 과연 누구에게 호소를 할 수 있겠습니까?

 

다윗은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하소서 하였습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나를 떠나 멀리 계시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돌아와는 관계 회복을 요구한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 후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가리웠듯이 다윗은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나는 지난 날 주께 범죄하여 내 영혼이 경각에서 신음을 한 일이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손이 내 뼈를 눌러 진을 빼는 것과 같은 아픔이었습니다. 보호자를 잃은 나의 영혼은 위로받지 못한 체 사망의 짓눌림의 고통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호소할 뿐이었습니다. 그 고통은 내 어미의 숨이 끊어질 때에도 겪지 못했던 고통으로 정말 뼈가 떨리고 영혼이 음부를 넘나드는 촉각의 순간이었습니다.

 

내가 그처럼 혹독한 영혼의 고통을 받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죄의 값이었습니다. 내 죄가 목전에 솟아 올라 사망 앞에서 나를 조롱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각 중에서도 내 영혼이 주를 향하여 울부짖는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지금 생각해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오늘 다윗은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외침은 나의 영혼이 사망의 늪에서 죽음의 사자를 만난 후에야 들을 수 있는 것임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흑암을 가르고 지나간 태풍 뒤에 오던 새벽에서야 내 영혼은 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 시편7편 영혼의 결백-

(시7:5)원수로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고 내 영광을 진토에서 떨어뜨리게 하소서(셀라)

 

시편 7편 서두에는 [다윗의 식가욘 베냐민인 구시의 말에 대하여 여호와께 한 노래]라는 주석이 달려 있습니다. 식가욘(Shiggaion)이란 고함소리를 뜻하는 것으로 앞장 흐름 보다 더욱 강렬한 통곡의 기도문이라 하겠습니다.

 

베냐민은 사울왕의 지파로서 사울은 구스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이 다윗을 죽이고자 할 때 그 상황이 촉박하여 생명이 경각에 달렸을 때 외친 기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윗이 그 아들 시므이가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하였을 때에 그 배반의 아픔을 노래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어쨌든 함께 밥을 먹던 혈육과 같은 사람에게 배반을 당하였을 때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시편 7편은 6편과는 사뭇 다른 입장입니다. 그 농도가 한 옥타브 고조된 상태로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6편은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라 한다면 7편은 의인이 결백 중에 이유 없이 대적으로부터 당하는 생명의 위협을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생명이란 영혼에 관한 것을 우선으로 합니다)

 

다윗은 1절에서 내 하나님이여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는 모든 자에게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하였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자신은 도울 자가 없는 상황에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 앞에 헌신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하다 보면 정말 말도 안되는 누명과 모함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억울함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 억울함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쳐도 그 올무는 점점 뼈 속까지 저며 올 때가 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것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대적에게 무고히 빼앗았거든 원수로 나의 영혼을 쫓아 내 생명을 땅에 밟고 내 영광을 진토에 떨어뜨리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다윗은 아무 연고 없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에게 아무런 잘못과 이유도 없이 생명을 위협을 받고 도망을 해야 했던 일이 있습니다. 또 왕이 된 후에도 아들 압살롬과 그의 동조자들의 반란으로 도망을 다녀야 했습니다.

 

한번은 왕에게 당한 것이고 또 한번은 자식에게 당한 것입니다. 이 모두 맞서서 대항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이 때 다윗은 자신의 결백을 호소하며 여호와께서 일어나 대적들의 진노를 막아 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여호와께 민족들의 집회로 주를 두르게 하 그 높은 자리로 돌아와 달라한 것입니다. 이것은 통치권과 관계된 것으로 지금 다윗은 국가를 다스리는 인간의 지혜가 무익함을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왕국 곧 메시야를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9절에서 악인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하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예나 오늘이나 전세계는 통치자들로 인하여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왕은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받은 자들로서 백성들의 안위와 국가의 명예를 지켜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왕들은 모두 자기의 명예와 부와 영광을 위하여 권세를 유지하려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매일 분노하신다고 진술하였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의 의가 이 땅에 임하기를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집행유예로 풀려난 사람이 나이 어린 소녀를 추행하고 죽인 사건으로 성범죄자들에게 전자 팔찌를 채워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사형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데 한 쪽에서는 사람의 손이나 발에 전자장치로 족쇄를 채우자는 목소리가 높아 지고 있습니다. 정말 모든 것을 법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위정자들은 이 범죄가 악한 영들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 배우에 있는 악한 영들의 역사를 죄의 속성을 갖고 태어난 인간이 어떻게 그 힘을 제어할 수 있을 것입니까? 결국 인간의 지혜는 사람들 몸에 생체 전자칩을 개발하여 666 시대를 스스로 이끌어 낼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도 범죄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날이 갈수록 악은 더욱 간교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음부로 이끌고 갈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인간이 죄인임을 스스로 깨달아 의로우신 재판장 앞에 죄의 허물을 벗어 놓고 여호와의 이름 앞으로 돌아 가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 시편8편 아름다운 주의 이름

(시8:1)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시편 8편은 메시야 찬송시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이 찬송을 가장 좋아합니다. 이보다 아름다운 표현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영감을 받은 다윗은 정말 위대한 사람입니다. 다윗은 1절에서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하였습니다.

 

여호와는 나와 관계성을 가진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속적 관계의 이름이지요. 또한 여기서 아도니(Adoni) 곧 Yeshua를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의 감각에 맞게한 다면 예수 나의 주 라는 말과 같겠습니다. 영어에서는 모두 대문자로 표기하여 메시야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구속자의 이름이 온 땅에서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메시야의 아름다움을 이보다 더 적절하게 표현할 말은 없을 것입니다. 다윗은 그의 이름의 아름다움은 그 영광이 하늘 위에 있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이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들은 하늘 아래 곧 땅 위에 있는 이름들입니다. 그가 무엇을 하였던지 그가 어떤 영광의 삶을 살았던지 그의 이름이 하늘 위에 둘 수는 없습니다. 하늘은 창조자의 보좌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2절에서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노래 하였습니다. 여기서 대적이란 막강한 힘을 가진 권세자를 말합니다.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대적할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어린아이로 그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대적과의 전쟁이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게 있다(엡6:12) 하였습니다.

 

주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사장들이 보내 군사들에게 잡혔을 때 베드로가 칼을 들어 병사의 귀를 잘랐습니다. 이때 주님은 베드로를 책망하며 내가 지금 열두 군단의 천사로 하여 이들을 물리칠 수 없겠느냐 하사며 칼로 이긴 자는 칼로 망한다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에 그 권능을 두셨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는 의로움과 순수함을 의미한 것입니다. 어린아이나 젖먹이는 오직 그 부모를 믿습니다. 또한 생사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으며 호흡하는 생명을 기뻐할 뿐입니다.

 

다윗은 3절에서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을 내가 보오니 라고 노래하였습니다. 과학자들은 우주에는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별들의 수가 10의 23제곱이라 합니다. 이것은 천억이 넘는 숫자입니다. 우리가 1분에 250개씩 센다 하드라도 750년이 걸립니다. 또 은하수에는 1조가 넘는 별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 수많은 별들이 횡성의 궤도를 따라 수 억년 동안 자기의 질서를 지키며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주께서 달과 별을 만드신 것은 별들로 땅을 비추게 하시고 주야를 주관하기 위해서 입니다(창1:16,17). 다시 말해서 그의 아들로 하여 영광과 그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다윗은 메시야를 말하여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하였습니다. 어떤 교회는 예수를 가리켜 마리아 품에 있는 연약한 아이 또는 죄수의 모습으로 십자가의 처형을 받은 자 형상의 로고를 부각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로고를 볼 때 감사함과 위대함을 생각하기 보다는 불쌍하고 처량한 자로 생각하게 합니다. 그들은 오히려 천사들을 높이고 경외하려 합니다. 그래서 그들 중에 선한 일을 하다가 간 사람들을 성인으로 추대하여 그들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연약한 아이와 죄수의 모습으로 오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만드신 천하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어 세세토록 경배를 받으시게 하기 위하여 보내신 것입니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이 세상 임금의 권세를 멸하고 그의 이름을 땅 위에 높게 세우셨습니다.

 

바울은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라(롬8:19) 하였고 다시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오직 우리가 천사들 보다 감간 동한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2:8,9) 증거하였습니다.

 

오늘 이 다윗의 찬송은 우리 교회로 하여 그의 영광을 찬송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한 가장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주의 이름이 아름다운 것은 온 땅에 주로 말미암고 또 주로 말미암아 그 영광의 날을 들어 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 시편 9편 여호와 찬송 -

(시9:11) 너희는 시온에 거하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시편 서두에는 무랍벤(Muthlabbn)에 맞춘 노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무랍벤이란 아들의 죽음이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이 시가 쓰여진 경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먼저 다윗은 감사함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감사는 감당할 수 없는 어떤 문제가 자신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기사로 해결되었음을 알리며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내 원수들이 물러 갈 때에 주의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기록하였습니다.

 

만약 자기 아들이 나를 따르던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적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그 환난을 모면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이겨도 자식이 죽는 문제요 자식이 이기려면 내가 패망을 당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아비를 배반한 아들의 배후가 하나님의 나라를 능멸하려는 악한 영들의 간교한 계략이라 할 때 이를 대응하기란 커다란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은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그들과 맞서지 않고 도망자처럼 피신을 하고 말았습니다. 궁에 남아 있던 후궁들은 모반자들의 충동으로 아들에 의해 백주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더러움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성경은 다윗의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였을 때 이미 이러한 일들이 있을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 중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살펴 볼 때 수레바퀴와 같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사업가는 성공적인 인생의 경영을 위해서는 성공한 사람들의 전기를 읽으라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으로 인생의 신후사를 돌아 보고 자신을 경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입니다. 성경은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전3:15) 기록하였습니다.

 

디윗은 7절에서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예비하셨도다하였고 다시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단을 행하시리로다 기록하였습니다. 공의로운 심판은 인간에게서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 자기에게 치우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불공평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스라엘을 성민으로 정하여 그와 대적 관계에 있는 이방인들을 그렇게 무참하게 죽일 수 있느냐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살펴 볼 때 그들이 받은 징계가 어떠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식을 징계하지 않는다면 그는 사생아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여호와는 압제 당하는 자의 산성이요 환난 때의 산성이라 하였고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다 노래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를 의지하는 것은 주의 은혜와 사랑과 그의 능력과 권세를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그 무엇으로도 원수의 사슬을 벗어 버릴 수 없을 때 주 여호와를 찾습니다. 주 여호와는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14:14)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의 아름으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은 주의 아름다운 이름을 찬송하며 그의 행하심을 널리 알리는 것입니다. 다윗은 너희는 시온에 거하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11)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세상은 그의 이름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그를 대적하여 이 땅에 선포된 여호와의 이름을 끊어 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한낱 인생에 불과한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여 일어나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열방으로 자기는 인생뿐일 줄 알게 하소서 간구하였습니다. 우리가 자기의 존재를 알 때 그리고 우리의 창조자와 주관자가 누구인 것을 알 때 그의 이름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열방 중에 그의 아름다운 이름을 선포하여야 할 것입니다.

 

나의 주님이시여 내가 당신의 아름다운 이름을 송축합니다. 내 인생 가운데 행하신 하나님의 기사와 능력을 내 영혼이 감사를 드립니다. 영존하시는 주여 영원토록 나의 기쁨이 되소서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