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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4:9)평강의 하나님

이요나 2007. 2. 28. 10:49

(빌립보서4:9)평강의 하나님

(빌4:9)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오늘로서 빌립보서 4장을 끝으로 3년동안 이어 온 서울 갈보리채플 목요예배의 요나의 설교는 막을 내립니다. 골로새서는 어딘가 주께서 인도하시는 곳에 가서 이어질 것입니다. 인터넷을 통하여 성경공부를 하시는 성도여러분께서는 잠시 휴식을 취하시면서 부족한 저의 앞날의 사역을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빌립보서 4장 1절에는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4장의 내용은 앞장과 관련하여 그 결론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1절에서 바울 사도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안에 서라'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를 향한 바울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사랑이란 단어와 사모라는 .말을 동시에 사용하였습니다. 사랑은 물론 신적인 아가페적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모는 마음에 이끌리는 연민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어쩜 부부간에 갖는 감정이기도 합니다.

또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는 명예의 칭호를 달아 주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께서도 예수께 사용하신바 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이러한 말은 아무에게 사용되는 말이 아닙니다. 자식이라도 기쁨이 아닌 근심스런 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경우는 정말 부모님께 근심스런 아들이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정말 가슴이 미어지는 기억들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쁨이 된다는 것은 정말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것인지 이것은 부모의 뜻을 따라 합당한 일을 하는 아들들에게 주어지는 말일 것입니다.

또 '면류관'(스테파노스)이란 경기의 최고 우승자나 전쟁 영웅에게 주어지는 감람나무나 월계수로 만든 관으로 영광과 존귀의 상징인 것입니다.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그 시대 영웅들에게 수여되는 최고의 영광을 한마디로 쉽게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이말은 오늘날 노벨상 수상자와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주안에 서라
바울 사도는 1절 끝에서 '이와 같이 주안에 서라'고 권면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미 우리의 신분을 하늘나라의 시민권자로 놓고 주 앞에 이를 때에 우리가 받을 상급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의 현실은 낮아지고 고통의 세월을 지낸다할지라도 우리의 최종적인 목표는 영광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2절에서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권면하였습니다. 여기서 거론된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모두 빌립보 교회를 섬기던 여인들입니다. 이들은 아마 빌립교 교회의 대표적인 인물들일 수도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교회에서의 여성들의 입지는 대단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봉사하는 일이 그리스도의 뜻을 벗어나 마음을 합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정말 문제입니다. 저는 오랜동안 순복음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 당시 순복음교회의 활동은 거의 자매님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한국교회의 문제점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3절에서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게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하였습니다. 우리는 3절에 기록된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이 어떤 일을 하였는지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성경 어느 데도 그들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전후 문맥을 따라 살펴볼 때 지금 빌립보 교회는 어떤 교회와 관련된 봉사에 있어서 자매들의 불협화음이 발생되고 있으며 그들은 복음사역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를 거론한 것으로보아 그들은 빌립보 교회의 초석이였던 루디아나 어쩜 귀신들렸던 헬라여인일 수도 있으며 로마 간수의 부인들일 수도 있습니다.

아마 그들은 빌립보 교회가 성장하고 주변의 힘을 얻으면서, 본연의 성도의 자세에서 벗어나 도리어 그들의 열심이 복음의 방해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디나 텃세는 있게 마련이고 어느교회를 가도 그 교회를 일으킨 재직들에 의하여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은 것은 사실입니다.

평강의 하나님
이제 바울은 빌립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 결과적 본론은 하나님의 평강을 이루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먼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기뻐하라"(4절)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먼저 우리의 기쁨이 주안에 있어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쁨을 세상에서 취하려 하고 있습니다. 믿음생활은 주일날 교회 가는 것으로 종교적 활동이 되어 버리고 세상 사람들 속에서 기쁨을 찾으러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내가 그를 기뻐하노라"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다시말하노니 기뻐하라"하였습니다. 우리가 근심 중에 기쁨을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좋은일이 있을 때 기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근심과 고통중에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알므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요 믿음입니다.

두번째로 바울은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하였습니다. 여기서 '관용'(에피에이케스)로서 너그럽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공정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취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면서 공평치 못하고 공정치 못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유익과 감정에 치우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세번째로 바울 사도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가 발생할 때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구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우리의 생각은 즉각적으로 그 문제를 합리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에 있어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궁국적인 삶이 영적 생활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로서도 알 수 없는 영적 공격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주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후 제자들을 먼저 강을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의 말씀을 따라 바다를 건넜으나 폭풍의 방해를 받았습니다. 이 때 주님은 바다를 걸어 오셨습니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대로 행할때 발생된 문제는 주께서 해결하십니다.

여기서 기도와 간구는 우리에게 좀 다른 감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그에게 주의 뜻을 묻는 것이며 간구는 필연적 조치를 요구하는 절실한 청구입니다. 바울은 여기에 덧붙여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하였습니다. 바울은 야고보서에서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정욕에 사용하기 위함이라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주안에서 합당하게 구한 것은 이미 받은 것임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바울은 7절에서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인에서 너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하였습니다. 결국 우리의 믿음생활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우리 스스로의 지성과 생각으로 해결할혀는 데 그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지키시면 그 어떤 문제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엇에든지
바울 사도는 이제 하나님의 평강을 이루기위한 최종적인 권면을 우리에게 하고 있습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8절)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에든지'라는 바울의 권면에 귀를 기우려야합니다. 이것은 어느 조건 어느 상황 어느 사람 어느 때 어느 일을 막론하고 참되고 경건하고 옳으며 정결하고 사랑할만하고 칭찬할만하고 덕이되어야 하고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최종적으로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리라"(9절)권면하였습니다. 우리가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성경에서 많은 권면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림에 떡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