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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3:8)고상한 지식

이요나 2007. 2. 28. 10:50

(빌립보서3:8)고상한 지식

(빌3: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베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우리는 2장에서 복음을 향한 열정과 성도의 교제가 활발하지만 마음을 합하지 못한채 다툼과 교만으로 뒤법벅된 빌립보를 권고하는 바울의 편지를 읽었습니다. 바울은 그를 위하여 그들의 사정을 밝히 아는 수제자 디모데를 보내기로 결정하고 에비브로디도와 같이 헌신된 자들과 같은 믿음을 갖어주기를 권면하였습니다.

A. 안전한 믿음생활
이제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로서 보다 진보된 믿음생활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하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는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빌3:1)하였습니다.

여기서 '종말로'라는 말은 끝으로 결론을 말할 때 사용하는 바울의 어법입니다. 바울은 이 말을 다시 4장 8절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바울은 이 내용은 잊어버리지 말고 정신차려 들으라고 다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먼저 '주 안에서 기뻐하라'하였습니다. 이 말은 4장 4절에서 다시 거론됩니다. 바울이 주안에 기뻐하라는 말은 새삼스러워지기까지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안에서 기쁘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 안에서 표현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입에 발린 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기쁨이 주안에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하여 성도의 기쁨이 세상을 사는 재미에 있어서도 않되고 돈버는 재미에 있어서도 않되며 설교를 잘하며 봉사를 잘하는 데 있어도 않된다는 말입니다. 2장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온전한 낮어짐 가운데 복종과 믿음의 제물로서의 삶 가운데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치 교회가 복주머니인 것 같이 여겨 내 일이 잘되면 예배 잘들이고 헌금 잘하는 것으로 성도의 임무를 다한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의 삶이 어떠 하던지간에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말에는 한계선을 갖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B. 율법주의와 믿음의 목표
두번째로 바울은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개들은 집에서 키우는 애완용이 아니라 떼를 지어 거리를 배회하며 먹을 것을 찾아 게걸대는 개를 말합니다. 오늘날 전국 방방곡곡도 모자라 해외원정을 일삼으며 성도를 밥으로 삼는 사역자들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이처럼 들떠있고 서로 높아진 이유는 성도들의 하망된 마음을 부추겨 교만케한 개들 때문이였습니다. 바로 그들은 손할례당으로서 할례를 통하여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잘못된 가르침을 일삼는 자들이였습니다. 저는 금번 중국을 다녀오면서 그곳에서도 많은 손할례당들이 이리 떼처럼 먹을 것을 찾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세번째로 바울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억지로 율법의 계명을 지키려는 것보다 성령으로 봉사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종됨을 자랑으로 할 것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제 바울은 자신의 과거의 행적들을 드러내어 버려야할 배설물이 무엇이며 추구하여야 할 믿음의 지식이 무엇인가를 변증하였습니다, 먼저 바울은 자신이 팔일만에 할례를 받은 이스라엘 족속 중 왕을 첫번째로 배출한 베냐민 지파였음과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당대의 최고 존경받던 바리새인이라 역설하였습니다.

바울은 6절에서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 말하므로 유대인 중 그 누구도 자신보다 더 클 수 없었음을 밝혔습니다. 바울은 믿지 않는 유대인을 설복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주께서 그에게 예루살렘을 떠나라 했을 때에도 "주여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을 저희도 아나이다"(행전22:18-20)하였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율법의 열심 할례당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은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했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이라'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지난날 화려한 인생을 벗어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향하여 살고자 하는 모든 사역자들에게 공감이 가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8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이처럼 지나간 인생의 화려한 추억들을 모두 배설물과 같이 여기는 이유에 대하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도 행위로 의로워지려고 하고 있고 또 많은 교회에서도 행함의 믿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지식으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말은 구원은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행함으로도 말미암는다는 유다서의 기록을 번복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말한 구원은 모든 인간의 출발점을 죄인으로부터 시작한 것이고 유다는 이미 예수를 믿어서 의인된 그 싯점에서 언급한 것입니다. 유다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인의 온전한 구원을 언급한 것입니다.

*부활의 권능
바울은 10절에서 주를 믿음으로 의인된 자의 최상의 목표와 이상을 언급하여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많은 목사들이 사경회나 고난 주일에 사용하는 말씀으로 이 말씀이야 말로 이 땅의 모든 성도들의 소망이요 흠모하는 삶의 자세요 성도의 최종적 목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오늘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은 생활을 하고 있는지 생각할 때 죽은 자 가운데 부활이란 우리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말하며 그 유일한 방법으로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죽으심의 고난 없이는 부활의 권능이 역사할 수 없는 결론을 제시한 것입니다.

또한 바울사도는 12절 후미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쫒아가노라'하였습니다. 바울은 아직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의 권능을 체험하지 못함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바울은 8절에서 '예수를 아는 고상한 지식'을 요구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최고의 이상적 목표가 부르심의 상에 있음을 고백하며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살을 위하여 좇아가노라"하였습니다.

우리는 늘 자신이 무엇을 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한 일에 대하여 그에 응분한 칭찬과 위로를 받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행한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직 우리가 더 깨달은 마음으로 행야할 일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까지 우리는 오직 그를 향하여 달려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16절에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빌립보 성도들이 자신들이 행한 일에 자만심을 갖고 으씨대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던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하였습니다.

C. 감성주의와 하늘의 시민권
앞에서 바울은 율법주의 자들을 경계하며 미래지향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언급하였습니다. 이제 바울은 감성주의자들을 경계하며 믿는 자들의 원초적 지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17절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래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하였습니다. 여기서도 바울은 그들의 일치된 마음과 행함을 요구하며 그 열매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 사도는 여기서 성도들 앞에는 온전한 모델이 필요함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말에 그 아버지와 그 아들이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의 행한 일들을 답습한 이삭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이처럼 인간은 자신이 배우고 본 바를 행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우리 앞에 선 믿음의 모델들은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바울은 18절에서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말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 일들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우리의 죄입니다. 우리의 죄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신의 생각과 지식에 의하여 하나님을 섬기려는 율법주의자들과 지식을 따르지 않고 감각적으로 일을 행하는 사람들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19)기록하였습니다. 먼저 바울은 그들이 하늘에조차 이르지 못하고 이 땅에서 멸망받을 것을 선고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하나님을 알되 그 목적이 물질에 있으며 물질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부르짖으며 거대하고 보기 아름다운 교회를 짓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지요? 과연 그 많은 물질들이 그처럼 허무하게 이 땅에서 마침이 되어야 할 것인지 정말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저는 이번 중국을 다녀 오면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물질과 시간은 자신의 것이 아님을 배웠습니다. 그곳에서는 우리의 풍족한 한 조각이 그들의 생명선이였습니다. 중국돈 100위엔(우리 돈 15000원)이 북한에서는 중국돈의 50배의 가치가 있다는 사실,,그들은 평생동안 그 돈을 만져 보지 못하고 죽는다는 사실은 나를 미치게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제 성도 믿음 생활의 각오를 향하여 "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하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시민권이 되고자 합니다. 그곳은 국가적으로 잘 살 수 있는 생활보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땅 어느곳에도 생활보장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 보장이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생활을 위하여 부르신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그와 영원히 살아갈 사람들로 택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의 형체로 살아갈 그 날을 바라보며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같이 낮아져 부활의 권능을 체험하여야 할 것입니다. 주여 부디 이루어 주십시요,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