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빌립보서강해

(빌립보서1:12) 복음의 진보

이요나 2007. 2. 28. 10:52

(빌립보서1:12) 복음의 진보

(빌1:12)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그들의 믿음생활 가운데 나타나야 할 실제적인 믿음의 행로들을 언급하며 반어법을 쓰고 있습니다. 반어법이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직접 말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 또는 사물을 빗대어 설명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12절에서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그 당시 로마황제 앞에 나아가야 할 중 죄인으로서 로마병사들은 8시간씩 돌아가며 바울의 쇠사슬에 자기 손에 걸고 바울을 지켜야 했습니다.

이러한 옥중 상황 속에서 로마법과 로마어를 구사하는 바울은 간수들에게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몇개월이 지나자 수비대 안에 있는 모든 병사들은 꼼짝없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비방하는 세상 사람들은 바울의 잡힘에 놓고 사도권을 비방하였습니다.

교회의 두 무리
15절에서 바울은 "어떤 이들은 투기로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하였습니다. 이 말은 그 당시 바울을 비방하는 사람들을 향한 것이지만 바울은 교회 가운데 발생된 두 종류의 사람들을 분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들의 성정에 대하여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하였습니다. 여기서 복음의 변명(아폴로게오마이)이란 '증명'이란 뜻으로 그 당시 잘못된 복음에 대한 바른 증거를 말한 것입니다.

오늘날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전도를 하는 사람들일 수록 투쟁과 분쟁으로 복음을 전하려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게 귀신론이나 성령론, 축복론, 종말론 같은 왜곡된 지식을 들고 마치 자기들만이 터득한 새로운 지식인 것처럼 다른 교회를 비방하며 싸우듯이 날뛰고 있습니다.

저는 서울 갈보리채플 사역을 하면서 많은 교파의 사람들과 마주서서 '복음의 변명'을 하여야 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우리가 전하는 은혜의 구원과 성령은사와 부활과 심판에 대하여 항변하며 억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진리는 억지를 쓴다고 바뀌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과 성령과 그의 택하신 사람들로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18절에서 바울은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잘못된 방법을 정당화 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은 그러한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전파되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19절에서 바울은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라고 말하여 그러한 비방과 고통의 환경이 성도들로 기도하게 하고 그로하여 성령의 도우심이 나타남을 설명하였습니다. 최근 나는 우리 교회에서 이러한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각 사람의 성정이 각각 다르고 개성이 달라서 인내하며 순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투쟁과 분쟁으로 달려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바울은 자신의 고통을 이겨내며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든 사역자들의 신앙고백이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성도의 기대와 소망이 부끄러움이 없어야할 것과 어떤 환경에서도 담대할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죽음을 초월한 헌신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이어서 바울은 자신의 육체와 이상의 갈등을 고백하여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것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런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었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욱 유익하리라" 하였습니다.

나는 오늘 이 글을 읽으며 많은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비단 나뿐이 아니라 이 땅에서 복음을 위하여 고통을 받는 모든 사역자들의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사는 재미가 솔솔한 사람들에게는 바울의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극심한 고통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차라리 속히 다음 세상으로 가기를 소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단순한 인생의 고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사역 가운데 나타나는 감당 할 수 없는 환난으로 속히 육체를 벗어버리고 주께 가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엘리야의 딜레마를 아실 것입니다. 그가 무한한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이방인의 사제 850명을 죽이고도 아합의 처 이세벨에게 쫒 갈멜산으로 올라 죽기를 간청하였습니다.

우리는 엘리야의 딜레마를 사역적 포기로만 보아서는 않됩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충실한 종으로서 자신의 할 일을 다한 것입니다. 다만 그는 썩어짐의 육신을 벗고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기를 소망했던 것입니다. 그는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어 영생의 옷을 덧입고자 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 갔지만 다시 이스라엘의 남은 시간을 완성하기 위해 다시 올 것입니다.

복음의 진보
바울은 25절에서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를 언급하여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하였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육체를 벗어난 부활의 신앙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언급하여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육체의 속성을 초월한 복음사역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생명이 육체에 국한되지 않은 것을 알 때에 이해가 가능한 것입니다. 누가 보든지 안보든지 처해진 현실 가운데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의 열매는 장차 후한 상급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빙거
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니라"하였습니다. 여기서 빙거란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확실하게 지적할 수 있는 증거를 말합니다. 바울사도는 지금 그리스도의 날에 사람의 모든 행함대로 받을 그리스도의 판단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끝으로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하였습니다. 이것은 빌립보 성도들이 바울 사도와 함께 하나가 된 것을 언급한 것입니다. 이것은 부부처럼 하나가 되었을 때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은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하셨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제도 바울 사도와 같은 눌림과 아품을 격고 있다면 여러분은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아직도 다툼과 분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입장에 있다면 여러분은 멸망의 빙거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