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쩐의 전쟁이라는 드라마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고작 악덕 사채놀이 업자들의 이야기지마는 이미 우리 사회에서 가운데 만연한 일이라서 그런지 돈에 갈급한 사람들 속에서 공감대를 이루고 있는 것 같다. 속시원한 일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요즘 세태에서 서민들의 막힌 가슴을 뚫어줄 드라마라가 있다는 것은 다행이다.
최근들어 과거 이태원을 주름잡고 거리의 돈을 쓸어 담던 날들이 눈 앞에서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있다. 나야 바늘귀를 뚤고 하늘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낙타 등에 얹은 돈짐을 모두 내려 놓아야 했지만 그래도 마음 넉넉한 동생이 살 여유가 있어 개척교회 목사의 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러나 수년전 단 한번의 태풍으로 모든 재산을 날리고 먼 산을 바라보는 동생의 얼굴을 보며 나는 아무것도 도울 수 없는 형의 고통을 되뇌이고 있다. 내가 세상에 나가 무엇을 할 수 있다면 그리라도 해서 무너져 가는 동생의 가문을 세워주고 싶지만 이미 나는 세상 밖으로 밀려난 사람이다. 내가 떠나는 것이 동생을 돕는 것이라 생각하여 일본이며 중국이며 미국이며 내 머리 둘 곳을 찾아 헤맸지만 번번히 하나님은 내 소망을 접으시고 한남동 채플을 지키게 하셨다.
내 기도를 귓전으로 흘리시는 주님 앞에 야곱의 심통이라도 부려 볼 심산으로 7년동안 해 오던 싱글 크리스챤들의 결혼을 위한 카페 사역도, 또 목요정팅도 문 닫아 걸고 '아름다운 문'이라 문패를 달아 버렸지만 솔직히 말해 그건 철부지의 고약한 심통이다.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눈흘기는 격이다.
그로하여 그나마 찾아들던 서로를 찾아 날던 나비도 떠나고 꽃도 말라 시들어 버리고, 심통 사나운 이요나만 심심해졌을 뿐이다. 그나마 근근히 채워오던 임대료마져도 들어 올 길이 막히고 나는 월말이면 하늘을 보고 한숨을 쉬어야만 했다. 어처구니 없게도 이 나이에 바라볼 곳이 하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직 하늘에 창을 내기로 작정을 한 날부터 달라진 것이 하나 있었다. 어느새 내가 매일매일 만나를 거두고 있음을 발견을 한 것이다. 나의 필요든 누구의 필요든 내 눈에 보이는 고통을 위해서는 기도하기로 작정하였고 이웃의 고통을 볼 때마다 내 심령이 이끄는대로 기도하여 왔다.
오늘 만원이 필요하면 만원을 달라고 기도하였고, 도울 자가 있으면 내어주기를 거절하지 않았다. 없어도 있어도 내 생명은 살아 숨쉬었고 오직 주의 날을 소망하는 내 생명은 영원한 생명 속에서 평안을 누리고 있었다. 월말이면 잠을 설칠 때도 있었지만 한번도 걸림없이 새달을 맞았다.
넘치던 목요정팅 모임을 부셔버리고 단 몇명의 젊은이들을 앉혀 놓고 시작한 화요성경공부는 적지만 조촐해서 좋았다. 꽃을 찾아 온 나비들의 전쟁이 아니라 말씀을 사모하는 똘망한 눈망울들이 빛나서 좋았다. 목사는 말씀을 사모하는 성도를 만나면 그 보다 큰 기쁨이 없다.
지난 달 말 분당에서 먼길을 달려온 전집사 부부 천당 아래라는 분당의 성도를 접해 본 일이 없는 요나의 가슴은 마치 천사를 만난 것 같았다. 나는 이 분들을 만나며 이 분들만큼은 말없이 떠나지 않는 성도의 인연이 되기를 기도했다. 그동안 말없이 떠나간 사람들로 인해 받은 상처는 가슴에 곪아서 암덩이가 될 것같았기 때문이다. 성도가 말없이 떠날 때마다 목사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되어 송별의 전화 한통 건네지 못한다.
감사하게도 분당의 전집사 부부는 이요나의 5월의 기도를 채웠다. 그들의 손길로 채운 틈은 한치도 부족하지도 한치도 남지도 않은 천사의 측량과도 같았다. 전집사 부부는 하나님께서 내게 보내신 5월의 천사였다.
어제는 사랑하는 형제 소명이의 어머니가 소천하셨다. 10여년의 병고를 조용히 내려 놓고 지극한 아들의 효도를 멈추셨다. 나는 소명이 어머니의 영정 앞에 서서 차라리 내가 먼저 가는 것이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았다.
바울은 얼마나 답답하였으면 내가 육체를 떠나 주께 가는 것이 소원이나 아직은 육체에 거하는 것이 너희에게 육익하다 말하였을까? 그러나 솔직히 말해 나는 천당아래 분당도 구경도 해 보지 못한체 세상을 떠날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직은 주님의 뜻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싶다
오늘은 아+점도 귀찮아서 점+저로 때울 생각으로, 먹어야 움직여 주는 육신을 끌고 향기고을로 들어섰다. 정말 요즘 같아서 먹지 않고 살수 있었느면 하는 생각이 절로난다. 나이든 노총각의 너절한 궁상 때문일 것이다.
허기진 배를 채우려 첫술을 뜨는 순간 전화 벨이 울렸다. 이번에는 천당아래 분당의 전집사가 아니라 관악산 아래 전집사가 달려 온 것이다. 외톨이로 밥상을 맞아야 하는 사람은 겸상해 줄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바로 식탁의 천사가 된다.
얼마전 직장 관계로 고심을 하더니 마음접고 프리랜서로 돌았다는 전집사, 장가든지 두해만에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 씨름장사의 허리보다 굵은 전집사의 허리가 휘청해 보여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세상과의 씨름에도 털털 웃어버리는 긍정적인 믿음이 있어 마음의 고통들을 넉넉히 누르고 있었다. 오늘 전집사는 하나님께서 내게 보내신 6월의 천사였다.
오호라! 내가 이제 더 무엇을 바라랴. 나는 부족하여도 주께서 나를 지키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하늘이여 내가 당신의 날을 바라나이다. 내가 아직은 하늘 아래 살겠나이다. 무엇을 주께서 하라 하시면 내가 그를 행하리이다. 부디 나로 주의 사람들을 축복하게 하소서.
이요나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