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3:13) 구원 다시 생각하라
(히3: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팍케 됨을 면하라
우리는 앞에서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히 생각하라는 바울 사도의 권면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은 주 앞에 부름을 받은 너희의 믿음의 상태와 삶의 행위를 생각해 보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세상 돌아가는 정세를 살펴 볼 때 심히 점점 빨라지고 있습니다. 세상이 빨라질수록 주님의 날이 가까워지는 것이라 할 때 믿는 우리에게는 기쁜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만 문제는 날이갈수록 사람들의 마음이 강팍해지고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는데 있습니다.
몇해전 어느 종교학자가 적그리스도의 시대를 간음하기 위해서는 한국교회를 보라 한 말이 생각납니다. 얼마 전까지만 전 세계 가운데 자랑을 삼던 한국교회가 이제는 똥칠한 막대기처럼 얼굴을 들 수 없게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여러가지 정황을 볼 때 점점 분명해 지는 것은 오늘날 우리나라 교회들은 지금 아주 중요한 시점에 서 있음이 확실해집니다.
*모세와 그리스도
바울은 2절에서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모세와 그리스도의 충성된 믿음의 유사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예수께서 세상에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도와 대제사장의 직무를 이행하실 때 모세와 같이 충성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세의 일생을 생각할 때 그는 화려한 왕자의 생활로부터 비천한 나그네의 생활을 하였으며 부르심의 때에 이르러 그 직무에 충실하여 하나님과 대면하는 영광을 입었습니다. 따라서 히브리 사람에게 있어 모세는 구원의 반석과 같은 광영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3절에서 바울은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하였습니다. 이것은 모세와 비교할 수 없이 월등하신 그리스도의 위치를 설명한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집이라도 그 영광은 그 집을 지은 사람에게 있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집의 본질
바울은 계속하여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그의 집'란 아버지께서 지으신 그리스도 자신의 집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장래에 말 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라는 말씀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말하게 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1장 서두에서 '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기록한 것입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집에 대한 설명입니다.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우리 성경에는 (우리는) 이란 단어가 생략되어 있습니다만 바울은 그리스도를 향한 장래의 소망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그리스도가 충실하게 섬기고 있는 하나님의 집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눈이 부실 정도로 웅장한 건물과 화려한 강단은 세계 속의 자랑이 되어 왔습니다. 주님의 시대에도 46년이나 아름다운 대리석으로 지어 온 성전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자신의 몸으로 지으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그 제자들 속에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여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집을 지으셨습니다.
*성령이 이른 바와 같이
바울은 7절 이후에서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팍케 하지 말라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함하고 증험하고 사십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 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 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흥미로운 것은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라는 귀절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시편 95편의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우리가 보는 한글 개혁 성경과 달리 킹제임스 성경 편집자는 이 부분에 괄호를 넣어 이 글을 읽는 우리가 더욱 조심할 것을 주석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해석할 때 주의 할 것은 이 말씀은 상징성을 찾을 것이라 아니라 오늘의 시점에서 이 말씀을 다시 전해 듣는 우리에게 성경기자는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서두에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도전의 역사
이스라엘의 구원으 역사를 살펴 보건데 그들은 끊임없는 도전(provocation=시험)의 역사였습니다. 신광야에서 먹을 것을 달라고 했을 때 그들에게 만나를 내리셨고 르비딤에서 목말라 하였을 때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을 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율법을 받은 직후에 시내광야에서 황금 우상을 만들고 그를 숭배하였으며 또 다베라에서 고기를 달라고 불평하였으며 가데스바아네에서 약속한 땅을 얻으라 하신 말씀을 거역하여 결국은 시편기자가 말하는 저주의 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일들이 애굽을 떠난 지 불과 2년도 채 되지 않아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쓰디쓴 경험을 한 지 37년 후 그들은 다시 가데스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불평하여 불뱀의 재앙을 만났으며 이스라엘의 마지막 정착지인 싯딤에서 이방인 선지자 발람에게 미혹되어 모압인들의 음행을 따름으로 '싯딤의 구덩이' (호9:10)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하나님 모세에게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케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였으되 내가 너희를 알던 날부터 오므로너희가 항상 여호와를 거역하였으니라"(신9:7; 24)하셨습니다.
11절의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 오지 못하리라'는 원래 '만일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 온다면입니다. 이것은 안식의 땅에 들어 온 자들 즉 갈렙과 여호수아와 광야에서 태어난 자들을 염두에 두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안식이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안식의 땅 즉 가나안 땅을 말씀하신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안식을 염두에 둔 것인지 이것은 그 듣는 자들의 믿음의 몫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12절에서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하였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구약을 인용한 것은 이스라엘의 배반의 역사를 우리에게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로 성령으로 미리 말씀하신 장래의 소망의 말씀을 지키게 하려함인 것입니다.
*오늘이라는 매일
그러므로 바울은 오늘을 사는 우리를 향하여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그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팍하게 됨을 면하게 하라" 권면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분명 오늘과 같이 죄의 유혹을 받는 우리를 향한 말씀으로 아직 장래의 소망에 이르러야 할 우리가 이스라엘이 받은 저주에 이르지 않기 위해서 매일 서로 권면하여야 할 것을 언급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권하며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하였으며 다시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증거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죄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을까요? 바울은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이 주를 믿을 때의 그의 은혜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의 죄악 가운데서 주의 음성을 듣고 믿을 때에 우리는 얼마나 감격하였으며 주를 믿는 우리의 마음 또한 얼마나 순결하였는지요. 그러나 오늘 주의 음성을 듣는 당신은 그 말씀으로부터 어느만큼 떨어져 있는지 깊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일렀으되
바울은 다시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팍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서 엎드러진 자가 아니냐"하였습니다.
바울은 동일한 말씀을 증거하면 위에서는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라 하였고 여기서는 '성경에 일렀으되'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보고 읽는 성경이 바로 성령으로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바울은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 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보건데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의 질문은 질문이라기보다 선포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불순종하는 너희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최근 많은 사람들이 구원에 관하여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구원이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믿을 때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단번에 얻어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구원이란 단어는 하나님의 시간속에 거한 단어로서 그리스도의 날에 이르기까지 그 믿음의 언약을 모두 포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단번에 믿은 그 구원의 역사로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든지 구원의 최종인 주의 안식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이라면 주께서는 그의 사도를 보내어 우리에게 다시 이 말씀을 전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을 때 단번에 얻은 구원의 은혜는 그의 오시는 날에 이르도록 이어진 다리와 같은 것으로 거룩하다 하심을 입은 자들만이 건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한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영원한 그리스도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갈 우리를 향하여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였다"(벧전1:4) 하였고 다시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 즉 언제든지 실족치 아니하리라"(10)하였습니다.
자, 이제 우리가 생각해 볼 차례입니다. 오늘 바울사도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입니다. 즉 바울은 성경이 너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깊히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경의 가르침을 받는 너희가 그 오랜 세월 속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의 말씀을 거역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구원받은 우리 모두가 그의 나라에 들어 갈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4장에서 뵙겠습니다. 구정 잘 지내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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