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히브리서강해

(히브리서2:9) 죽음을 맛보심

이요나 2007. 6. 28. 16:13

(히브리서2:9) 죽음을 맛보심

(히2:9)오직 우리가 천사들 보다 잠간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바울은 5절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말한 바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주를 믿는 많은 사람들 마음 속에 아직도 자리 잡고 천사들에 대한 동경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모세나 엘리야에 대한 유대인의 관심은  대단하여 하나님께서 다시 그들을 통해서 다시 역사하실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복음서에도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주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상에 올랐을 때입니다. 비몽사몽 간에 주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말씀하심을 본 베드로는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이곳에 초막을 셋을 지어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엘리야를 위하여 입니다 하였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소리가 있어 저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과 혈족 관계 속의 위대한 지도자들을 통해서 자신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의식은
 오늘날 각국이 추구하는 패권주의적 사상을 낳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된 인간으로는 큰 구원을  이룰 수 없으므로 마지막 날에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세상으로 하여 그에게 복종케 하신 것입니다. 
 
  I. 복종과 온전
바울은 6절에서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 하시나이까 저를 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시편 8장에 기록된 말씀으로 다윗이 성령의 충만하심으로 노래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시편 8편의 말씀은 전반적으로 인자라는 표현과 함께 사람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지만 사실 이것은 다윗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아직 보지 못한 세계 속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를 노래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다윗을 증거하여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지가 우리 중에 있거니와 그가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예언을 하였다' 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자들에게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이끌어 오실 때에 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실 것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만물을 복종케 하기 위해
바울은 계속하여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만물이 그 발 앞에 복종케 하셨는데 아직 저에게 복종치 아니한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한계 속의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육체의 한계를 갖고 있어서 부분적으로 보고 부분적으로 생각하고 부분적으로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시간과 공간의 모든 질서가
 그의 안에 있으므로 시작과 끝의 전체를 보시므로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우리는 그 시작과 중간에 있음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때가 이르면 그로부터 지음을 받은 천하 만물이 주권자이신 그에게 복종할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로마서에서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8:19-21) 증언하였습니다.

 *온전케하심

9절에서 바울은 "오직 우리가 천사들 보다 잠간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나 또 말씀에 대하여 의심을 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하여 불경한 말들을 일삼으려 합니다. 그가 창조자이고 천하 만물의 주관자이면 어찌 살아서 만물을 복종 시키지 못하고 죽었느냐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이름에 나타난 사망 속의 인간을 위해 예정하신 위다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지 못하여 하는 말들입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9절 말씀 속에서 잠간동안 천사 보다 못하게 하심을 입은 예수와 또 부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주를 보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였다면 우리는 예수를 주라 하지 못할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믿는 우리를 위하여 성령을 부어주어 우리는
 주의 영으로 보고 말하며 주의 영광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설명하여 이해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그가 우리처럼 주를 영접하기 전까지 이것은 하늘에 속한 신비가 될 것입니다.

여기서 '죽음을 맛본다'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 사랑의 원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죽는 것보다 의로운 일은 없다 하셨습니다. 스펄전은  밤을 세워 어둠의 고통을 겪지 않고는 그 아둠의 고통을 알 수 없으며 눈물로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을 논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난에 함께 참여하지 않고서는 그 고통을 알 수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미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한 자가 아니요 우리와 같이 한결같이 시험을 받는 자'(히4:15) 하였으며 다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빌2:6,8)  증언하였습니다.

 II. 구원의 대장

그러면 주께서 이처럼 천사보다 잠간 못하게 되어 인간의 고통에 참여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울은 이에 대하여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을 저의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10)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는 데는 많은 생각을 요하기도 합니다만 여기서 말한 '구원의 주'는
 '구원의 대장'(KJV)을 말한 것입니다. 대장이란 어떤 그룹의 총수로서 전쟁의 선두자입니다. 여기서 '많은 아들'이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를 가르키는 말씀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주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친히 우리의 대장이 되어 육체의 고난을 받으신 것은 친히 구원할 자들의 대장이 되셔서 그들과 함께 영광에 들어가려 하려 하신 것을 설명한 것입니다. 

바울은 11절에서 "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로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라 기록하였습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라는 말씀은 우리를 한없이 영광스럽게 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께서 이사야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셨습니다. 거룩이란 하나님의 신성에 속한 이 세상에 없는 용어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임재하심 속에 나타난 신성과 위엄과 영광인 것이니다. 이사야는 보좌를 향하여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땅에 충만도다' 창화하는 천사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를 흥미롭게 하는 것은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셨다'라는 말씀입니다. 형제란 한 아버지로 난 자들입니다. 지금 성경은 죄인 된 우리를 친히 죄인의 대장이 되어 거룩하신 그의 피로 죄를 대신 하시고 우리로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자기와 한 아버지의 아들로서 형제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