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잠언서 강해

(잠언30:7-9) 완성된 지도자의 자질

이요나 2007. 7. 12. 19:32

(잠언30:7-9) 완성된 지도자의 자질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아오니 나의 죽기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한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7-9)

 

I. 영혼의 각성(1-6)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방패시니라(5)

 

A. 수신자와 발신자

잠언 30장과 31장은 우리에게 또 다른 것을 깨닫게 하는 지혜의 글이다. 이 글들은 저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큰 지혜를 깨달은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과 믿음을 사람들 앞에 자신의 신앙고백을 한 내용이다. 따라서 본문에 나오는 저자의 이름은 실명이 아닌 각성자로서 믿음의 후배들에게 전하는 신앙고백이라 하겠다.

 

아굴과 야게의 이름은 성경에 소개된 바 없다. 또한 유대인의 전승에도 소개되지 않은 이름이다. 다만 아굴이라는 말의 뜻이 수집자 또는 편집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어서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큰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자신이 깨달은 바 믿음의 지혜를 기록한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성경기록자들은 모두 수집자이며 편집자들이다. 모세오경도 아담으로부터 부름받은 사역자들에 의해 기록되어 내려오던 것을 모세가 수집하여 집대성한 것이다.

 

아굴의 아버지 야게는 순종하는 자, 경건한 자라는 뜻으로 보아 그의 가정은 대대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역자의 집안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수신자인 이디엘우갈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디갈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으로 임마누엘 이란 말과 그 의미가 유사하며, 우갈은 전능하신 자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들은 야굴에게 성경을 가르침 받는 문하생들이 아닐까 한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라고 하겠다.

 

흥미롭게도 이디갈은 느혜미야 11장의 베냐민 자손 중에 나오는 이름으로 그는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느혜미야를 따라 귀국하여 예루살렘에 가주한 베냐민 지파 구백이십팔명 중의 한 사람이다. 따라서 이디갈은 베냐민 자손일 가능성이 크다.

 

이 글을 보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의 겸손함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부분적인 깨달음을 가지면 자기만의 깨달음과 같이 기고만장하여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고 많은 사람들 앞에 자기의 이름을 나타내려고 한다. 이로 하여 사실 이단이 나타나고 많은 교파가 파생 된 것이다. 이에 바울은 내 말과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4,5) 하였다.

 

B. 아굴의 신앙고백

아굴은 2절에서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함이 있지 아니하니라 고백하였다. 이 시대에 최고의 지혜자이며 통치자인 솔로몬 왕의 잠언 가운데 수록된 자신의 글에서 자신을 짐승에 비하한 것은 참으로 존경스럽다. 더욱이 그는 자신을 다른 사람에 비하여 짐승이라 하였다.

 

사람이 원래 지식을 갖추면 자신을 높이고 자신의 이름을 내기 마련인데, 아굴은 스스로 자신을 비하하여 다른 사람에 비하여 짐승이라 격하하며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않다하였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는 위대한 왕이나 당대 최고의 석학들과 자신을 비교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비하여라 하였으므로 어쩌면 이들은 이굴과 함께 동문수학하던 성경학자들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사실 다른 사람의 글들은 감히 잠언서에 오르지 못하였음을 생각할 때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함을 가진 아굴은 지극한 믿음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 틀림없다. 

 

계속하여 그는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3) 고백하였다. 원래 지혜란 배우는 것이 아니며 많은 지식 가운데 터득하는 것이며, 또한 거룩한 자를 아는 지식은 지식에 속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깨닫는 지혜인 것이다. 아굴이 이처럼 간단한 말로서 자신의 믿음을 증거할 수 있는 것은 그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의 지혜를 터득하였고 인생 가운데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터득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신성을 말하여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 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티끌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4) 물었다.

 

이 말은 과연 자신의 깨달음에 대하여 묻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무지함을 인하여 묻는 것인지 그 의도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사망 중에 거하는 인간 중에 감히 누가 있어 천지만물을 운행하시는 자의 이름을 논할 수 있겠는가?

 

일찍이 동방의 의인 욥과 그의 친구들이 의에 대하여 논할 때 그들이 많은 말로 하늘의 이치와 지혜들을 논하였으며 여호와께서 친히 임하시어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욥38:2) 책망하시며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욥38:3) 하셨으며, 네가 바다의 근원에 들어 갔었느냐, 땅의 넓이를 네가 측량하였느냐, 네가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비가 아비가 있느냐 이슬 방울은 누가 나았느냐, 하늘의 묘성을 네가 지었느냐(욥38장 참조) 하였다.

 

특별히 야굴은 그 이름이 무엇인지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느냐? 물었다. 우리는 성경의 증거로 하나님의 이름과 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자기 백성에게 나타내시기 전에 어느 지혜자가 있어 창조자의 이름을 알 수 있겠으며 또한 아직 오시지 않은 자의 이름을 알 수 있겠는가?

 

이제 그는 창조자의 비밀한 지혜를 얻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에 대하여 말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5) 증거하였다. 여기서 순전함이란 정금을 제련하듯 아무런 흠이나 결점이 없는 완전함과 도덕적 성결함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는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을 언급한 것으로 다윗은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과 같도다 (시46:1,2) 증거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에는 하나님 말씀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 앞에 많은 우상을 세우고 또 재물과 권세로서 소망을 성취하려 한다. 그러나 성경은 네가 하늘의 법도를 아느냐, 가슴 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며 마음 속의 총명은 누가 준 것이냐?(욥38;36) 하였으며 주께서도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마6:27) 하셨다.

 

그는 계속하여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6) 하였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각 시대에 맞지 않아서 나름대로 부족한 부분을 우리가 보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로 하여 탈무드와 같은 변형된 율법이 탄생되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율법의 변질됨을 지적하신 바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4:12) 증거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부족함이 없다.

 

만약 누가 성경 말씀에 자기의 생각과 지식을 더한다면 그는 하나님보다 더 지혜로운 자로서 그가 믿는 창조자의 이름은 문선명이나, 이만희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사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을 창조자 하나님이라 부르게 한다.

 

성경의 마지막 기록자 계시록 기자는 만일 누구든지 이 예언의 말씀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22:18,19) 기록하였다.

 

II. 아굴의 기도(7-10)

너는 종을 그 상전에게 훼방하지 말라 그가 너를 저주하겠고 너는 죄책을 당할까 두려우니라(10)

 

A.     영혼의 자각 우상숭배와 거짓 사상과 지식

자신의 신앙고백을 마친 아굴은 이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린다. 그는 먼저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7) 하였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아굴의 필생의 기도에 속한다. 참으로 아굴은 겸손하고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말에 아는 것이 많으면 먹고 싶은 것도 많다는 말이 있는데 아굴은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지식을 터득한 사람으로 고작 두 가지를 놓고 필생의 기도로 삼았다.

 

오늘날 사람들은 매일매일 수많은 기도를 주께 고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죠지 물러 목사가 응답받은 기도책을 놓고 그와 같은 기도를 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기도를 들어 보면 상당한 믿음을 갖고 있어서 하늘의 영광에서 땅의 평에 속한 모든 것으로 시작하여 백두산을 돌아 제주도까지 이르며 죽은 조상에서부터 태어나지도 않은 아들에 대하여까지 말하며 결국 그들의 기도의 목적은 돈과 명예를 달라는 것으로 종결 짓는다.

 

사람들은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주께서 가르치신 주의 기도를 따라 한 것이라고도 말하고 야베스의 기도를 배운 것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기도의 원리를 가르친 것이지 주문과 같은 기도의 모범답안을 주신 것은 아니다.

 

오늘 아굴의 기도는 실제적이며 현실적이다. 그는 곧 허탄한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8) 하였다.

 

여기서 허탄이란 파멸교활을 뜻하여 곧 우상숭배의 허망함을 의미한다. 혹시 여러분은 거대한 불상 앞에 열심히 불공을 드리는 사람들을 본 일 있는가? 불단에 나열된 불상과 그 뒤에 받쳐놓은 무시무시한 나한들을 보라 얼마나 허탄한 것들인가? 그러나 사람들은 그 허탄한 것을 향하여 자기의 소원을 빌고 있다.

 

또한 거짓말이란 거짓 선지자나 거짓교사들의 잘못된 사상과 지식을 말한다. 이들은 잘못된 지식과 사상을 가르쳐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한다. 그로하여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훼방하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난다(롬1:18) 증거하였다.

 

또한 베드로 사도는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벧후2:1) 경고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라(벧후2:2) 증거하였다. 또한 계시록 기자는 우리가 들어갈 영원한 천국에는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 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계21:27) 기록하였다.

 

B.     육체의 소욕 재물과의 관계

아굴의 두번째 기도는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하였다. 이 기도는 다시 말하여 세상에서 먹고 살아가는 수단에 대한 기도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육체를 주셨다. 육체는 본능적인 욕구를 갖고 있어서 이 욕구를 통하여 육체의 소욕을 채우게 된다.

 

하나님이 육체의 본능을 주신 것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체력의 원동력을 얻기 위한 음식에 대한 욕구이다. 이로서 사람들은 식물을 얻기 위해 땀을 흘려 일을 하게 된다. 또 다른 하나는 성적 욕구이다. 이는 부부간의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의 종족들을 번성하고 충만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의 문제는 사람들이 육체의 욕구에 종이 되어 버리는데 있다.

 

오늘날 세상은 온통 살기 위한 전쟁에 빠져 있다. 살아가는 목적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집 짓고 하는 일이다. 결국 재물을 얻기 위한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고 그 재물들은 육체의 만족을 위해 쓰여진다. 그로 인하여 세상에는 범죄가 끊이지 않으며 이러한 욕구의 충족에 빠져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홀해진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막10:23) 하시며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막10:25) 하셨다. 이것은 부자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 속에 역사하는 돈의 속성을 말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요즘 드라마 쩐의 전쟁은 오늘날 사람들의 삶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잘 들어내고 있다. 

 

아굴은 계속하여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9) 하였다. 오늘날 많은 목사들의 타락이 무엇 때문인가 생각해 보라 아굴은 지금 복음 사역자들이 가져야 할 건전한 재물관을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한 때 재물의 풍족한 때를 누려 본 일이 있다. 그러나 재물이 풍족하다고 심령이 평안한 것은 아니다. 만약 내가 재물을 갖고 있으면서도 평안을 누렸다면 나는 절대로 복음사역의 진리 가운데로 나오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하루하루 먹을 것을 위해 기도한다. 나는 오늘 내게 만원이 필요하면 그것을 주십시요 기도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하나님은 나의 이러한 기도를 한번도 거절하지 않으셨다. 이것이 내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동행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이고 또한 하나님의 축복이다.

 

C.     부르심의 지혜

아굴은 10절에서 너는 동을 그 상전에게 훼방하지 말라 그가 너를 저주하겠고 너는 죄책을 당할까 두려우니라 증거하였다. 이 말씀은 매우 흥미롭기도 하고 의미심장하기도 하다. 어떻게 생각하면 사회 윤리를 말하는 것 같지만 복음의 사역자된 아굴이 윤리를 말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복음적 계시의 시각이 필요하다.

 

먼저 성경에서 종은 하나님의 일군을 말하며 그 상전은 스승에 속한다. 내가 지금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굴의 잠언의 문맥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종들에게 관련된 것으로 지금 아굴은 그의 믿음의 후계자 곧 복음의 일군들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은 모두가 어린아이로 출발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왕이라도 이 땅에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 모태로부터 태어나 양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장과정을 통해서 그에 합당한 식물과 지식을 습득하고 삶의 체험을 통해 인생의 경륜을 얻게 된다. 이와 같이 영의 양식에 있어서도 우리는 젖으로 양육을 받는다.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곡한 자 곧 그리스도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네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3:1,2) 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율법을 가리켜 초등학문이라 한 것이다((갈4:1-7 참조).

 

그러므로 복음의 진리 가운데 속한 자들이라도 그 성장과정에서 많은 실수를 범하게 된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의 성숙치 못한 믿음의 행각들을 보게 되며 사도가 된 이후에도 베드로는 바울의 책망을 받기까지 하였다.

 

우리는 사도행전 10장에서 흥미로운 내용을 보게 되는데, 베드로는 이방인 전도의 부름을 받기 전에 하늘로부터 내려 온 네 발 달린 짐승이 든 보자기 환상을 통하여 그의 안에 있던 완고한 유대인의 속성이 무너지게 된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동성애자나 트렌스젠더들을 대하는 교회의 시선은 곱지 못하다.

 

사도행전 10장 바로 앞에는 욥바에서 여제자 다비다를 살린 기적이 소개 되고 있다. 그후 베드로는 피장 시몬의 집에 여러 날 묶고 있었다고 기록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죽은 자를 살린 기적을 일으킨 사도가 왜 하필이면 피장의 집에서 묶고 있었을까 의심스럽다. 욥바에 믿는 자들이 없었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살아난 다비다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많았다 하였고 그곳의 제자들이 룻다에 있는 베드로를 욥바로 데려 왔으므로 그곳에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있었다.

 

아마 어쩌면 베드로는 자신의 손을 통하여 나타난 기적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충동을 받는 것이 싫어서 그들의 초대를 거절하고 사람들이 죄인처럼 생각하는 피장 시몬의 집에 들어갔을지 모른다. 물론 시몬도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해야 한다.

 

그 당시만 해도 믿는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율법적 경계가 있었다. 세리나 죄인들로 여기는 사람들과 허물없이 밥을 먹으며 교제를 하는 것은 오랜 율법의 전통과 관습적 생활이 벽을 쌓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라도 말하면서도 세리나 피장이들과 함께 식탁을 하면서 교제하는 것은 금기로 여겼다.

 

피장이란 가죽 세공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짐승의 가죽을 벗겨야 하고 죽은 짐승에게 손을 대는 것은 율법이 저주한 것이므로 그와 함께 앉는 것도 저주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하신 것을 기억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사람들의 초대를 거절하고 피장의 집에 머물게 되었을 것이다. 이 순간만큼은 아마 그는 자신은 정말 겸손한 주님의 제자라고 느꼈을 것이며 사람들은 베드로의 그러한 믿음을 존경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주께서 환상 중에 짐승을 잡아 먹으라 명했을 때 그는 나는 주께서 금하신 것을 먹지 않겠나이다 하고 세번이나 완강히 거부하였다. 베드로의 마음 속에는 아직도 스스로 억제할 수 없는 위선적인 본능이 있었던 것이다. 이에 주께서 하나님께서 깨끗게 하신 것을 네가 더럽다 하지 말라 말씀하셨다. 이것이 베드로가 사도가 된 후에도 성숙해져 간 과정이다. (나는 가끔 꿈속에서 옛 날의 더러운 모습을 즐기고 있는 나를 본다. 과연 나는 아직도 그 더러운 속성을 벗어버리지 못한 것일까? 아직 나는 회칠한 무덤처럼 위선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일까?)

 

주님은 세상을 떠나가시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요13:10) 하시며, 다시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4,15)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이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주께서 떠나신 후 복음의 시대를 이끌고 가야 제자들에게 주님은 왜 이와 같은 본을 손수 보이신 것일까? 이것은 우리가 아직 육체에 머문 동안 완전한 지혜를 터득하지 못하여 과오를 범할 때 주의 부름을 받은 형제들은 서로를 정죄하지 말고 서로 용납하고 씻어주어야 한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너희를 나의 제자라 하리라 하신 것이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시몬아 시몬아 사단이 밀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너희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내가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형제들을 굳건히 하라(눅22:31) 하셨다. 이처럼 복음사역의 일선에 있는 제자들은 모두 사단의 공격을 받기 때문에 깨어있지 않으면 누구라도 실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너희의 헤아림으로 헤아림을 받으리니 있는 자는 더욱 받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막4:25)하신 것이다.

 

계시록 12장에는 흥미로운 말씀이 나온다. 바로 사단의 본체 용에 관한 말씀이다.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뱀 곧 마귀라도고 하고 사단이라도고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계12:9) 기록되었으며 다시 그를 설명하여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다(계12:10b) 기록되었다. 여기서 우리 형제를 참소하던 자들은 과연 누굴일까? 이들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들이 틀림없다.

 

주님은 부르심의 원리를 말씀하시며 먼저 된 자의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된다 하셨다. 이것은 사역의 우선순위를 말한 것이 아니라 누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였는가에 기준을 두신 것이다. 그러므로 종의 권세는 그 주인에게 있으므로 아무도 그의 종들을 주인 앞에서 훼방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들의 증거와 그 결말을 욥기에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롬14:4) 증거하였다.

 

III. 세상을 망치는 존재(11-20)

이제 아굴은 11절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과 생물들을 비유하여 복음 사역자들이 삼가고 행하여 할 지혜들을 전하고 있다. 먼저 우리는 세상을 멸망 시키는 세 그룹의 존재들이 무엇인가 그룹별로 살펴 보자

 

A.     악한 세대(11-14)

먼저 아굴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악한 네 그룹을 소개한다. 아비를 저주하고 어미를 축복하지 않는 무리를 지적하고 있다. 부모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명의 도구이며 그 운명을 사람이 스스로 바꿀 수 없다. 다만 인간은 좋던 싫던 그 아비와 어미를 통하여 생명이 탄생되고 그의 사랑과 은혜를 입으며 양육을 받을 뿐이다.

 

그러므로 십계명에서도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이 사회법 최우선으로 등장한다. 성경은 부모에게 공경을 하면 이 땅에서 장수하고 많은 복을 누릴 것이라 기록하였다. 오늘날 세상이 악해가면서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이 조건부로 변하고 있다. 자식이 부모에게 자기 권리를 주장하고 보모는 마치 자신을 위해 봉사할 의무만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들은 패역의 선봉에 선 자들이다.

 

두번째로 아굴은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면서 오히려 그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다(12) 증거하였다. 이들은 가증한 위선자들을 말한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알고 있다. 안식을 범하면 죄인의 벌이 임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안식일에 초대를 받아도 커피 한잔도 제 손으로 가져오지 않고 다른 사람을 시킨다.

 

사실 그들 말대로 율법을 어겨 지옥에 갈 것이라면 하나님으로부터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받은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는 셈이 아닌가? 오늘날도 자신은 거룩한 자로 자처하면서 더러운 것을 씻지 않는 목사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모두 악한 세대들이다.

 

세번째 악한 무리는 눈이 심히 높아 그 쌍꺼풀이 높이 들린 무리들이다. 이들은 콧구멍을 높이 들고 사는 무리다. 교회에 앞줄에는 귀부인과 귀족의 자리에 앉아 갖은 우세를 다 떨고 있는 교만한 사람들이 많다.

 

가장 악한 무리는 가난한 자를 땅에서 삼키며 궁핍한 자를 사람 중에서 삼키는 무리라 하겠다. 이들은 자기 유익을 위해 사람들을 노예로 삼고 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아직도 이 땅에는 김정일과 같은 독재자가 있고 아프리카 사람들을 착취하여 부를 축척하는 무리들이 있다.

 

B.     만족을 모르는 자(15-17) 거머리

이제 아굴은 만족하지 못하는 속성을 소개하였다. 흥미롭게도 그 서두에서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고다고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하였다. 거머리는 강 유역에 살면서 피를 빨아 먹고 사는 환영동물이다. 이것은 사람들의 욕망이 마치 피를 빠는 동물의 욕구에 비교한 것이다.

 

먼저 그는 곧 음부와 아이 배지 못한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아니하는 불이니라 증거하였다. 이 모두가 인격으로 표현된 것이 흥미롭지만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의 속성을 비유한 것이다.

 

음부는 불순종한 자들이 들어갈 형벌의 장소다. 이 음부는 인생 중에 함께 살고 있어서 마지막 심판의 때에야 그 곳에 있는 영혼들을 토해놓고 영원한 불 못으로 던져진다. 인류가 있은 후로 그 엄청난 사람들의 영혼을 가두고도 음부는 아직도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이 아직도 사람들의 소욕은 자기의 영혼이 갇힐 음부를 향해 달려 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아이 배지 못한 태라는 표현은 참으로 흥미롭다. 이것은 질투와 시기를 의미한다. 야곱의 처 라헬과 레아는 서로 자매라도 자식을 얻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불러 일으켰다. 자식을 갖기 위한 것이야 본능적이라 할 수는 있으나 자기의 것을 얻기 위해 시기하고 질투한 나머지 가인처럼 형제를 죽이기까지 한다. 다윗이 밧세바를 취하기 위해 그의 남편 우리아를 죽인 일을 기억해 보라. 이와 같이 자기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소욕은 생명을 빼앗는 시기와 질투를 불러 일으킨다.

 

계속하여 아굴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아니하는 불이라 증거하였다. 폭우와 태풍이 일 때 보라 물이 넘쳐 세상을 물로 심판할 것 같지만 여전히 그 물은 어디로 빠져 버린다. 또한 거대한 산불이나 빌딩에 솟은 불길을 보노라면 마치 세상의 심판과도 같다. 이것은 모두 인간의 욕망과 육체의 속성을 비유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17절의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를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이리라는 기록이다. 아굴은 여기서 갑자기 뜬금없이 왜 아비와 어미에 대한 불순종을 언급한 것일까?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다. 아버지라 부는 것은 그가 나를 낳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태초로부터 당신을 낳고 키운 복음의 진리에 순종하지 못한다면 결국 당신의 영혼은 안식을 얻지 못하고 육신의 소욕에 이끌려 음부로 내려가고 말 것이다. 이에 바울은 너희가 육신으로 살면 반듯이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3) 증거하였다.

 

C.     은밀한 자취(18-20)

아굴은 18절 이하에서 은밀한 자취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이것은 사람들의 영혼과 마음을 얽기 위한 악한 영들의 역사라 할 수 있다. 먼저 그는 공중에 날아다니는 독수리의 자취를 말하였다. 새 중에 가장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이 독수리다. 그런 의미로 성경에서 독수리는 신성의 존재로 언급된다. 그러나 하늘에는 자기의 자리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려 하는 존재가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네가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사14:14) 책망하였다. 우리는 이 악한 영들의 자취를 인간은 알 수 없다.

 

두번째로 아굴은 반석 위로 기어 다니는 뱀의 자취라 증거하였다. 뱀이 물위를 다니던가, 풀 숲을 다니던가 해도 그 흔적은 남지 않는다. 반성이라 말한 것이 참으로 흥미롭다. 바울은 반석을 말하여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그리스도시라 (고전10:4) 증거하였다. 또한 주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하셨다. 이와 같이 사단은 교회 위를 넘보고 있는 것이다.

 

아굴이 세번째로 말하는 은밀한 자취는 바다로 지나다니는 배의 자취. 그러나 요즘은 초음파를 통하여 배의 자취를 모두 읽고 있다. 이것은 아마 은밀한 상술, 교묘한 정치를 말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계시록 18장에는 호화로운 바벨론 성의 멸망을 말하여 그러한 부가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각 선장과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인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이 멀리 서서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외쳐 가로되 이 큰 성과 같은 성이 어디 있느뇨(계18:17,18) 하였고 다시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계18:21) 증거하였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던 상업주의의 종말인 것이다.

 

끝으로 아굴은 남자가 여자와 함께한 자취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요즘은 몰래 카메라로 들어 낼 수 있다. 오늘날 세상은 온 통 성적으로 문란해지고 있다. 이제는 남녀의 관계를 떠나서 하나님께서 저주하신 역행의 관계까지도 용납하는 시대가 되었다. 세상은 이처럼 소돔의 심판을 향하여 달려 가고 있는 것이다. 20절에서 잠언기자는 음녀 곧 간음하는 여자의 길도 그러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경에서 음녀는 또 다른 의미를 우리에게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계시록 2장에는 교회가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하였음을 책망하며 그가 그리스도의 종들을 꾀어 행음하게 하였다 기록하였으며, 그의 모습을 말하여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계17:4) 하였다 기록되었다. 이는 분명히 세속적으로 타락하여 적그리스도 체제 속으로 들어간 거짓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IV. 세상을 이끌어 가는 존재(21-33)

이제 아굴은 특별한 이 세상을 이끌어 가는 세 그룹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우리는 이들을 통하여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할 수 있다.

 

A. 역행의 세대(21-23)

먼저 아굴은 세상을 진동 시키며 세상으로 견딜 수 없게 하는 것들을 소개하여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과 꺼림을 받는 계집이 시집간 것과 계집 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라 소개하였다. 이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다시 말하여 천지가 개벽한 것이나 다름 없다.

 

우리가 이 부분을 이해할 때 해석의 이중성을 생각해야 한다. 볼록렌즈와 오목렌즈가 함께 있으며 동전의 앞뒤와 같다 하겠다. 이것은 인간의 양면성 곧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 것과 거룩한 신성을 따르는 것이 내 안에 함께 있는 것과 같다.

 

우리 말에 개천에서 용났다라는 말이 있지만 종이 임금이 되기란 이숍 이야기나 야화의 이야기일 수 밖에 없다. 현실 속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이고 역전인생은 항상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이것이 가능하다. 모든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처음에는 종으로 오셨으나 이제 그는 만군의 왕으로 오실 것이다. 또한 그를 따라 의인된 우리도 그와 함께 왕노릇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속한 것이다.

 

성경은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 보다 크지 못하니(요13:16) 기록하였다. 이것이 성경적 공의다. 그러므로 종이 임금이 되는 것은 위계질서의 역행으로 반역이 틀림없다. 이것은 인위적인 방법으로 스스로 권세를 찬탈하는 경우다.

 

각 나라의 역사를 보면 이런 자들이 항상 있게 마련인데 성공한 자는 개국공신이 되고 실패한 자는 천추의 역적이다. 조선의 시조가 된 이성계도 고려의 장군이었다. 고려의 몰락은 이성계로 개국의 기회를 주었다.

 

누가 반역의 기회를 잡아 성공하려면 반역의 대의명분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으면 혁명의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한다. 이러한 이유로 똑 같은 유신독재를 수립하고도 박정희 정권은 역사적 박수를 받고, 전두환 정권은 역사적 괴수가 된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서에는 나라의 영광을 그에게 주지 않을 것이나 한 비천한 자가 나타나 평안한 때를 타서 궤휼로 그 나라를 얻을 것이라(단11:20) 기록되었다. 이 일은 장차 적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 적용될 것이다. 그는 자기 스스로 만군의 왕의 자리에 앉으려 할 것이나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않은 뜨인돌이 나타나 그를 멸하실 것이다.

 

두번째 기이한 일은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이라 하였다. 옛날에는 있는 자는 있었고 없는 자는 대대로 계속 없었다. 그래서 잘 먹는 자는 대대로 잘 먹고 못 먹는 자는 대대로 굶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생각지도 않던 사람이 한방에 재벌이 되기도 하고 지혜로운 자가 오히려 밥을 굶기도 한다.

 

여기서 미련한 자란 세상적인 사람들을 말한다. 오늘날 교회는 서로가 정통성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어느 신학교를 나와야 하고 석사와 박사 과정을 논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은 목사보다 박사의 호칭을 좋아한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형제들아 너희의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이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1:26) 하였다.

 

1960년대 미국에 등장하여 세상을 진동하는 갈보리채플 사람들은 모두 세상 속에서 딩굴든 육체의 사람들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고전4:10)라 하였으며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롬16:19) 권고하였다.

 

세번째로 아굴은 세상을 진동하는 것을 들어 꺼리김 받는 계집이 시집 간 것이라 하였다. 옛날 같으면 어림도 없는 것이다. 유대인들 중에서는 돌로 맞아 죽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마태복음에는 기이한 네 여자가 소개되고 있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과 기생 라합과 모합여인 룻과 솔로몬을 낳은 우리아의 처 밧세바이다. 이들은 모두 메시아의 족보에 들어 있는 여인들이다. 모두가 순결과는 거리가 먼 여인들이다. 이처럼 하나님 안에서는 불가능이 없다. 더러워진 것은 세상으로부터이며 거룩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B. 생존의 지혜(24-28)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있다. 빌라델피아 교회 다음에는 부에 눈먼 라오게디아 교회가 있다. 은혜의 때는 영광의 날이 이르기까지 인내와 절제와 투쟁의 믿음으로 성취 된다.

 

아굴은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으로 견딜 수 없게 하는 자들의 반열에 오른 자들에게 세상을 사는 지혜를 말하여 땅에는 작고도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위해 여름에 예비하는 개미와 악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과 임군이 없으되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손에 잡힐 만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니라(24-28) 하였다.

 

개미를 보라 정말 크기와 무게와 활동 면에서 봐도 가장 적은 곤충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몸 보다 몇 십 배 큰 먹이를 협동하여 자기 집으로 가져간다. 이들의 움직임을 보면 작은 것에는 적은 일군이 보다 큰 것을 위해서는 많은 인력이 따른다. 개미는 활동할 수 없는 겨울을 위해 먹이를 스스로 준비한다. 과연 오늘날 교회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 것인가? 하늘을 찌를듯한 교회를 지으면 대환난을 피할 수 있는가?

 

두번째로 아굴은 사반 곧 산토끼를 소개하였다. 토끼는 겁이 많아서 크게 놀라기만 해도 숨이 멎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토끼처럼 겁이 많다 하였다. 그러나 중동의 토끼는 반석 사이에 집을 지어 어떤 위험이 닥쳐도 몸을 피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아굴이 돌이라 하지 않고 반석이라 칭한 것이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18:2) 하였으며 다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19:14) 하였다. 또한 바울은 우리가 다 같은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그리스도시라(고전10:4) 하였다.  

 

우리는 토끼와 같이 겁이 많고 연약한 존재들이다. 안개와 같이 없어질 존재인 것이다. 항상 사단이 광명한 얼굴로 우리를 삼키려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우리의 구원의 반석이시며 산성이다. 우리가 이 반석 위에 집을 지으면 창수가 나도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성경만으로는 부족하여 심리학이나 세상의 마케팅 전략과 같은 전술을 교회 들여와 사람들을 상담하기도 하고 복음전도의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토끼보다도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계속하여 그는 임군은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를 소개하였다. 메뚜기가 왕이 없다는 것은 흥미롭다. 사실 개미나 벌도 그 임군이 있다. 이것은 위계질서를 갖고 있다는 말인데 메뚜기는 상하 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큰 문제 중 하나는 주께서 미워하시는 골라당의 조직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교회가 무슨 계급사회처럼 집사, 장로, 목사들의 위계질서를 자랑한다.

 

내가 갈보리채플에 와서 가장 자유롭게 여기는 것은 목사나 성도나 형제나 자매나 모두가 그리스도의 형제라는 것이다. 다만 우리에게는 성령의 세례로 각자에게 주신 직무가 있을 뿐이다. 이 직무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역의 도구로서 교회 안에서 그 어떤 직분적 위용을 갖지 못한다. 만약 우리 교회가 이처럼 직분에 치우친다면 우리가 로마 카톨릭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끝으로 아굴은 손에 잡힐 만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을 소개하였다. 다른 성경은 거미라고도 번역되었다. 왕궁은 허락받지 않은 자는 절대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거미는 그 어떤 곳에도 거침없이 줄을 뽑아내어 집을 짓는다. 누가 치우면 다시 곳 넓은 곳이든 천정 위던 아래던 어느 곳에도 발 일 공간만 있으면 자유자재로 집을 짓는다. 바울은 아시아와 유럽일대를 돌며, 유대인 회당이든 거리든 관청이든 로마황제 앞이든 그는 거침없이 입에서 복음을 쏟아 내었다.

 

주님은 믿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1,32) 하셨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누린다면 우리는 왕궁이든 그 어떤 위험의 장소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C. 지위와 권세와 투쟁(29-31)

이제 우리는 온전한 사역의 지혜를 배우기 위한 세번째 그룹을 만나게 된다. 아굴은 잘 걸으며 위풍 있게 다니는 것을 소개하여 짐승 중에 강하여 아무 짐승 앞에서도 물러가지 아니하는 사자와 사냥개와 수염소와 및 당할 수 없는 왕이니라(30-31) 하였다.

 

사자는 태어남으로부터 용맹한 본성을 갖고 있어 어려서부터 그 어미에게 짐승의 왕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는다. 그러므로 사자의 목표는 최고의 승자를 원한다. 이것은 우리도 태어남으로부터 이미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책정함을 받은 사람들이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싸워 이길 수 있는 태성적 전투본능이 있다. 환경이 어려워지고 극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인은 달려 나간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한 그리스도의 생명의 피가 함께 하기 때문이다.

 

킹제임스 성경은 그레이하운드 사냥개라고 기록하였다. 또 다른 성경은 이라고도 번역하였다. 사냥개든 말이든 이 짐승들은 목표물을 정확히 쫓아가는 민첩함과 신속함으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인에게 절대 순종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의 주인의 명령을 따라 싸워야 할 투쟁의 대상이 있다. 그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나의 작전은 무익하다. 절대로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여야만 한다. 주인을 통한 오랜 훈련의 경륜만이 투쟁에서 승리를 할 수 있다.

 

원래 수염소는 지혜롭지 못하다. 그러나 염소 떼 앞에 선 수염소는 절대로 자기의 위치를 양보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 안에 양의 무리가 한곳으로 모여들면 그 기세를 제압하기 위해 뿔로 받아 헤쳐 뜨린다. 또한 수염소는 절대로 양들처럼 제 길로 나가려 하지 않는다. 이처럼 사역자는 절대로 자기 위치를 떠나서는 않된다. 천사는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옮기리라(계2:5) 경고하였다.

 

끝으로 아굴은 당할 수 없는 왕을 소개하였다. 왕은 절대 권세의 소유자다. 그러므로 그가 무엇을 하고자 하면 그대로 실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든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이든 그들은 모두 멸망하고 말았다. 당할 수 없는 왕은 오직 만군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그를 당할 자는 이 세상이나 오는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그에게 하늘에 속한 것이나 땅에 속한 것이나 바다에 속한 것이든 그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이다.

 

V. 승리와 패배의 차이

A. 상황 판단 능력

아굴은 마지막 문단에서 만일 네가 미련하여 스스로 높은 체 하였거나 혹은 악한 일을 도모하였거든 네 손으로 입을 막으라(32)하였다. 이것은 현실 상황을 대처하는 처신의 능력을 말한 것이다. 인간은 다 장래를 알지 못하고 피 흘리는 데 발이 빨라서 앞에 있는 멸망을 바라보지 못한다. 그래서 교만한 자리로 스스로 올라가 파멸을 자처한다.

 

우리는 다니넬 4장에는 느부갓네살 왕의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도 교만하여 신상을 세우고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였을 때 하늘의 신이 그를 낮추어 사람에게 쫓겨나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았고 손톱이 새 발톱과 같이 칠년을 살다가 때가 이르러 그가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그의 총명이 다시 돌아와 영생하시는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찬양을 드렸다 기록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변함 없으신 것이다.  

 

B. 일의 질서와 결말을 예지하는 능력

끝으로 아굴은 대저 젖을 저으면 뻐터가 되고 코를 비틀면 피가 나는 것같이 노를 격동하면 다툼이 남이니라(33) 경계하였다. 일본말로는 이런 때 아다리마에라고 한다. 당연한 말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를 가르칠 때 사용되는 말이다. 사필귀정이라고도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뻔히 될 결말을 가지고 모험을 하려 한다. 이것이 도박성 기질이다. 한 순간의 육체의 쾌락 때문에 에이즈에 결리고 알코올과 마약과 성중독에 빠지고 증권과 도박에 파산을 당하고 만다. 그들이 사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론적으로는 모두 알고 있다. 다만 그들이 이기지 못하는 것은 자기의 욕정과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최대의 적은 자기인 것이다.

 

나는 서른 살에 예수를 믿어 30대에 엄청난 속력을 내며 살았다. 그때는 부러운 사람이 없었고 마치 내가 제왕이 된 듯했다. 하나님이 나만을 축복하시는 것 같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은 거침없이 행했다. 나는 무엇이든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해도 좋은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세상은 사람이 행할 것과 짐승이 행할 일이 따로 정해져 있었다. 우리의 영혼과 몸은 하나님께서 주신 신령한 선물이어서 오직 하나님을 경배하며 감사와 찬양을 드리기 위해 주신 것이다. 우리의 몸은 내 것이 아니라 피의 값을 주고 산 하나님의 성령의 전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우리의 몸으로 신령한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이다. (다음주 31장을 눈 여겨 보아 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