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13:1) 세상 권세 앞의 그리스도인의 삶
(롬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이 정하신 바라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예배(합당한 예배)가 어떤 것인가를 살펴 봄으로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우리는 한계속에 속한 연고로 보고 듣고 터득한 그 범위 내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그 예배는 그 예배의 본질이 우리의 생각과 제도적인 형태로 들여지는 예배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믿음의 분량을 따라 나누어 주신 은사로 나타나는 신실한 우리의 믿음의 형태임을 알았다.
또 우리의 예배는 일정한 범위를 갖춘 성전에서의 예배 행위가 아니라 우리 삶 전체를 통하여 우리와 이웃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나야 하는 진실한 사랑의 실천임을 생각할 때 우리가 오늘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정말 수치로운 자신의 종교활동이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바울은 우리의 사랑의 실천 범위에 대하여 성도는 물론 일상 속에서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손님) 그리고 우리를 핍박하는 자와 우리와 원수의 관계를 가진 자들에게까지 나타나야 할 것을 요구하며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말하였고 다시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12:17-18) 기록하였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부분은 12장에서 연결된 영적예배의 실천 요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주어지는 영적 세계 속에 속한 것이지만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의 날까지 결국 세상 가운데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바울은 먼저 우리 인간의 모든 삶을 지배하는 권세 즉 정치적인 부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사실 정치란 지배의 권위를 말하는 것인데 이 지배의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신령한 자 아담에게 주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아담의 불순종으로 이 권세는 사단에게 주어지고 죄의 인간들은 모두 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세상의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라 기록하였다. 이것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성경은 이미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11:36) 기록하였고 하늘 보좌에 앉으신 주의 사자들도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4:11)고 증언하였다. 따라서 비록 주의 오심까지 사단이 죄의 세상을 지배하고 있으나 천지만물의 모든 권세는 영원하신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바울은 서두에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이 정하신 바라” (롬13:1) 기록하였다. 굴복이란 굴욕적인 복종이기도 하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세상 권세는 우리 그리스도의 나라는 아니다. 이 세상의 권세는 모두 사단에게 넘겨져 버렸다.
우리는 누가복음에서 예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시험을 받을 때에 마귀가 예수 앞에 나아와 천하만국을 그에게 보이며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니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눅4:6) 하였다. 이 때 주님은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으셨다. 그러면 오늘 바울이 말한 바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다’는 말씀은 무엇인가? 이는 사단도 피조물로서 이 세상의 모든 주권이 주 하나님께 있다 하신 말씀이다.
계속하여 바울은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롬13:2) 말하였다. 어쩌면 이 말은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받은 그리스도인들로서 납득이 잘 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 보편적인 세상의 이치를 말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에게 삶의 지침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이 말을 하게 된 동기를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생전에 바리새인들로부터 ‘세금을 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이는 로마정부에 대하여 복종하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저항해야 하느냐에 대한 시험이였다. 이 때 주님은 너희가 사용하고 있는 동전을 가져 오라 하신 후 이 동전에 조물된 것이 누구의 화상이냐고 물으셨다. 그들이 가이샤라고 답하자 주님은 가이샤의 것은 가이샤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 하셨다. 또 그들이 제자들의 공세에 대하여 시비하자 주님은 베드로에게 낚시에 먼저 오르는 물고기의 입에서 동전을 취하여 공세를 내라 하셨다. 이 모든 것은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모두 세상권세에 대한 질서를 따라야 함을 손수 보이신 것이다.
여기서 아직 우리는 세상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를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실 때에 그가 ‘네가 왕이냐?’ 물었을 때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해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요18:37) 하셨다. 또한 예수께서 잡혀가실 때 베드로가 칼을 들어 잡는 자의 귀를 베었을 때에도 네 검을 거두라 하시며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영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니냐?”(마26:53) 하셨다.
이와 같이 우리 믿는 자들은 진리 가운데 펼쳐진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 속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이다. 그러나 아직 이 세상이 존재하기까지 곧 그의 나라가 임하시기까지 우리는 이 세상 권세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주님은 이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하였다. 이는 마치 거대한 톱니바퀴 속에 연결된 것같과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내용들을 우리는 에스겔서 1장18절로 25절의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지금 온 세상은 하나님이 운행하는 거대한 톱니바퀴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리는 자로서 심판을 자취한다 한 것이다.
바울은 3절에서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하였다. 아무리 악한 통치자라도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 벌을 내릴 수 없다. 여기서 선이란 그들 조직과 법령에 대항하는 것이 아닌 사회에 베푸는 선을 말한다. 그러나 만약 누가 선을 행한다 하여 그들의 조직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면 그는 칼로 그를 다스릴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권세자들에게 반하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유대인들이 나치에게 무참히 죽어간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사실 독일의 조직이나 그들에게 맞선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다만 하나님을 믿는 민족이라는 것 하나로 미움을 받아 순교를 당한 것이다. 또한 각 나라마다 교회가 세워질 때에는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하나로 권세자들에게 쫓김과 핍박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기까지 한다. 이들은 모두 그리스도와 함께 한 복음의 순교자인 것이다.
바울은 5절에서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하였다. 사실 우리가 권세자들의 권세에 복종하는 것은 그들의 행위가 선하고 옳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자들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질서에 복종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날이 이르기까지 평안한 삶을 살기 위함이다. 바울은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딤전2:1-3) 증거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우리에게 양심을 위해 선을 행하라고 권하고 있다. 이것은 양심에 꺼리기는 일은 도무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양심의 가책에 관한 것이다. 성경은 우리 중에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이 있음을 경계하였다.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은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그는 결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그에게는 합당한 심판이 있을 것이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바울은 계속하여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6) 하였다. 여기서 공세란 오늘날 주민세와 같은 것으로 그당시 각 사람의 머리마다 내야 하는 인두세를 뜻한다. 또한 세상 권세자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일꾼이라 칭한 것은 좀 아이러니하다. 이는 악한 임금이라도 각 사람에게 세금을 거두어 세상의 질서를 이끌어 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백성을 섬기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이에 바울은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를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지를 두려워 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7) 하였다. 여기서 국세란 수입상품에 부과되는 세금을 뜻한다. 오늘의 부가가치세도 이에 포함될 것이다. 이는 각각 여러가지 부여된 세금을 수납하라는 말이다. 최근 최고 공직자들 청문회에서까지 세금을 채납한 사건들이 불거지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치리자의 위치에 설 수 있을지 의문이다.
또한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내각이 새롭게 조각되었는데 그들은 거의 기독교인들이였다. 그런데 그들의 들어난 치부를 보면 모두 부동산 투기와 탈세와 명역문제, 논문 표절과 같은 비 양심적인 일들이다. 이런 일들은 세상 사람들도 하지 않는 일인데 하물려 교회의 직분을 받은 사람들로 공직에 임할 사람들이라니 이명박 정부의 내각구성은 도덕성 시비에서 먼저 결격이 될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결코 그냥 지나치시지는 않을 것 같다. 그들을 지명한 최고 권력자가 하나님을 믿는 교회 장로이기 때문이다.
또한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고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오늘날 교회는 너무 부요하고 비대해져서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어떤 사람 앞에서도 안하무인이 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백성들 중에서나 세상 조직 속에서 존경받을 만한 사람은 그가 우리와 다른 종교를 갖고 있다 하드라도 존경하여야 하며 또 우리를 살피는 모든 사람들을 조심스럽고 두려워하여야 할 것이다.
II. 사랑의 의무(8-10)
이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본질 적인 삶 두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사랑에 속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소망에 속한 것이다. 먼저 바울은 8절에서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나는 갈보리채플을 개척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빚을 져왔다. 그들은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보잘 것 없는 나에게 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이 알지 못하게 하듯이 나의 필요한 것들을 채워 주었다. 그들의 베품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계속하여 바울은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8b)하였다. 사람들은 율법은 구약 때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지키지 않아도 된다 말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주께서도 내가 온 것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러 왔다 하셨다. 율법을 완성시킨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율법의 부족함을 뜻한 것이다.
바울은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역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먕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여 하심이니라”(롬8:3,4) 하였다. 그러면 율법의 요구란 무엇인가? 그것은 육신의 연약함으로 범할 수 밖에 없는 죄에 대한 요구 곧 죄의 결국 사망을 뜻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없다 하심을 얻고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것이다(롬8:2)
오늘날 교회는 너무나 많은 사랑의 빚을 지고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한 특혜로 생각하여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가 특권을 많이 누리면 누릴수록 정치적 집단의 시녀가 되고 있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결국 어느날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질질 끌려 다니게 될 것이다.
바울은 9절에서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어 있느니라”증거하였다. 이 말씀은 우리가 간음이나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탐내는 것은 큰 죄로 알아 경계하고 있는데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하신 주의 명령은 소홀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모든 율법이 가르치는 강령이라 하셨다. 이보다 다 큰 율법은 없다하신 것이다.
또한 바울은 10절에서 악을 행하지 않아야 할 것을 말하여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하였다. 우리가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도 중요하지만 악을 도무지 행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웃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원한을 풀지 않고 용서하지 않는 일들은 모두 이웃에게 악을 행하는 일이다. 바울이 이 말을 우리에게 강조한 이유는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에 악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메스콤을 통해서 악한 일들을 서슴지 않은 어떤 교회 사람들의 보도를 보고 있다. 그들 속에는 유명 목사들이 이름들과 행한 일들이 거명되고 있다. 그런데도 그들의 얼굴에서 전혀 회개를 찾아 볼 수 없는 것은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에 대하여 꼭 물으실 것이다.
몇해 전 일어난 옷 로비 사건을 보라 얼마나 수치로운 일이며 어느 교회의 mbc 제작실 점령 사건이라든가 이 모든 일들은 참으로 보기에도 역겨운 작태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얼마 전 우리 카페 게시판에서 어느 형제의 어머니께서 같은 교회의 집사라는 분에게 당한 카드 사기에 대한 글을 읽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요즘 어느 목사는 교회 재정과 건축을 명목으로 성도들에게 다단계 판매를 조직하기도 한다. 그들은 모두 입으로는 사랑을 외치지만 양의 털을 깎는 도적들이 틀림없다.
III. 그리스도의 최고의 소망(11-14)
세번째로 바울은 우리가 해야할 일에 대하여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나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11) 하였다. 우리가 세상 가운데서 선행과 바른 행실을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믿음의 결국인 영혼의 구원이다(벧1:9). 만약 우리가 선한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현실 생활에 만족을 하고 있다면 우리의 믿음은 반쪽짜리요 후회의 종교생활이 되고 말 것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 시기를 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시기란 바로 주께서 오시기 전에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뜻한다. 그 전에 하나님은 그의 거룩한 성도들을 하늘로 들어 올리실 것이다. 죄의 백성들과 함께 심판 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날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알고 있다. 그렇다 그의 날은 하나님에 속한 비밀이다.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너희가 이 시기를 안다’ 하였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우리가 그날이 언제일지 알지 못하지만 그날이 가까운 시기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예수께서도 우리에게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니니 이와 같이 모든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마24:32,33) 하셨다.
또한 바울은 종말의 때를 염려하는 성도들에게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도적같이 이를 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살전5:1) 하였고 다시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살전5:4,5) 증거 하였다.
그렇다 세상 사람들도 종말이 가까웠음을 시인하고 있다. 세상은 갈수록 포악해지고 패역하여 어떤 법으로도 그 어둠의 세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다. 연일 감당할 수 없는 죄악들이 우리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이는 밤이 깊어졌음을 우리에게 가시적으로 알리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하였다. 그러면 어두움의 일은 무엇인가? 바울은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하고 시기하지 말라’(13) 하였다. 이 모든 일들이 우리 목전에서 행해지고 있지 않은가?
바울은 에베소에서도 바울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엡4:22-24) 증거하였다. 옷처럼 벗고 입으라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주님은 너희 오른 손이 범죄하거든 찍어 버리라 하셨고 오른 눈이 범죄하거든 뽑아 버리라 하셨다. 이는 죄를 범한 손은 찍어 버렸으니 너는 다시 범죄할 손이 없다 하신 것이며 범죄할 눈을 뽑아 버렸으니 네겐 다시 범죄한 눈이 없는 사람처럼 살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가 이처럼 낮과 같이 단정한 생활을 하여야 하는 것은 우리가 모두 행위에 따란 선악간에 판단을 받아 선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죄를 범한 자는 심판의 부활을 받기 때문이다. 바울도 이를 말하여 "우리가 다 반듯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증언 하였다.
오늘날 실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떠나 세상에 물들어 가고 있다. 누가 그리스도인이고 누가 믿지 않는 자인지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우리의 믿음의 세계는 혼탁해 지고 있다. 바울은 단호하게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14) 하였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말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입은 자들로서 그리스도의 형상대로 살아가라 하신 말씀이다. 그리스도처럼 생각하고 그리스도처럼 말하고 그리스도처럼 행동하라는 말씀이다.
이제 우리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실 날이 가까웠다. 당신은 그의 심판대에 서지 않을 수 있을 것인지 자신을 돌아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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