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14장 강해)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자유”
(로마14:22)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있도다”
(서론) 크리스챤의 전형적인 문제(13:14)
앞에서도 여러 번 언급하였지만 로마서의 주제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다. 1장부터 8장까지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원리가 기록되었고 9장부터 11장까지는 하나님의 소망 가운데 있는 의의 섭리가 기록되어 있으며 12장부터 16장까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하기 위한 의로운 삶의 원리가 기록되었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볼 로마서 14장은 그리스도인의 의로운 삶의 원리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신령한 예배와 진정한 사랑(12장), 그리스도인의 세상살이(13장)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자유(14장)에 대해 기록되었다.
바울은 13장 마지막 절에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14)고 권고하였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매우 중요한 내용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극복해야할 전형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만약 누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는 아직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 증거한 것이다.
또한 바울은 아직 그리스도인의 의로운 생활을 하지 못하는 성도들을 향하여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데 너희는 유혹의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엡4:20-24) 책망하였다. 이처럼 육신의 습관들은 그리스도인을 괴롭히는 족쇄와도 같다.
계속하여 바울은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니라” (골3:8-17) 이는 사람들과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이성적인 문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극복해야 하는 문제는 내적으로는 육신에 속한 정욕의 문제요 둘째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자기교만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13장 끝에서 바울이 말한 바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에서 도모라는 단어는 헬라어 ‘pronoian’으로 앞서서 생각하는 것, 또는 미리 계획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육신의 일은 정욕의 욕심을 따라 달려 가는 속성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에 사도 요한은 종말을 사는 우리에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은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되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일2:15-17) 하였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봉사하며 어떤 목적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 이를 위해 베드로는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벧전4: 11) 권하였다.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12)
A. 믿음에 관하여
바울은 서두에서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1)하였다. 바울은 여기서 믿음에 관한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믿음을 말할 때 있다 없다, 믿음이 크다 작다로 구분한다. 이는 믿음의 속성에 속한 것으로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믿음을 가질 수 없으며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극복할 믿음을 갖고 있지 못함을 전제한다.
믿음에 대한 이러한 속성에 대하여는 복음서에 중심이 되고 있다. 마가복음 9장 19절에서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리요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책망하셨으며,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는 주의 말씀을 들은 귀신들린 아이의 아비는 ‘내가 믿겠습니다.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막9:24)간청하였다.
또한 예수께서 어린 자의 실족시키는 자에게는 화가 있을 것을 경계하시며 그런 상황이라도 네 형제가 범죄하면 경계하고 회개하면 하루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 말씀하실 때 주의 요구에 믿음의 한계를 느낀 제자들은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눅17:5) 청하였다. 이는 모두 믿음의 존재가치를 나타내는 말씀이다.
계속하여 바울은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2)하였다. 이는 믿음이 강한 우리도 연약한 믿음으로부터 출발되었음을 전제하고 있다. 또한 바울은 성령의 능력이 넘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3:2) 하였다.
3절에서 바울은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았음이니라”(3) 기록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이러한 글을 쓴 동기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물론 여기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여전한 상황이다.
히브리 기자는 그리스도교로 전향한 히브리 성도들을 향하여는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도리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먹을 자가 되었도다”(히5:12) 책망하였다. 이는 그들이 히브리 민족으로 태어남으로부터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전통을 가졌고 또 복음의 은혜에 참여한 사람들이 되었음에도 그들의 믿음이 율법에 매여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우리는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유대인의 지도자 니고데모에게 예수께서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이것을 알지 못하느냐 힐문하셨다. 이처럼 오늘날 성경이 요구하는 믿음은 성경의 학문적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기름부음을 통하여 계시적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경륜을 따라 성취되는 믿음에 속한 비밀이다. 이에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롬10:17) 증거하였으며,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4:13)라고 기록하였다.
B. 비판에 대하여 – (비판:exoutheneito)
바울은 ‘그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1a)하였다. 비판에 관한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팔복에 속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 (마7:1-3) 하셨다. 이는 판단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이다.
바울은 4절에서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하였다. 이는 성도의 믿음의 주권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그가 잘났던 못났던 성도의 믿음에 관하여는 우리가 서로 판단할 대상이 아니라 그 모든 주권이 그를 부르신 주 예수께 있다는 말이다.
야고보 기자는 이를 말하여 “형제들아 파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시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약4:11-12) 기록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가 주의 성도의 믿음의 행실을 판단한다면 스스로가 교만하여져 재판자의 위치에 선 것이 되는 것이다.
C. 비판의 동기가 무엇인가?
5절에는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이는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하였고 다시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6) 기록하였다.
이 부분은 다른 사람의 신념에 관한 말씀이다. 설혹 우리 중에 누가 우리가 깨달은 가르침에 대하여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하드라도 그 문제는 우리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우리 또한 깨달음이 있기 전까지는 그들과 같이 믿음의 초보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바울은 깨달은 우리를 향하여는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갈4:10-11) 하였으며 다시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골2:16-17) 기록하였다.
이는 성경의 가르침을 터득한 자들이 주변의 상황에 이끌려 다시 돌아 눕는 경향을 경계한 것이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골2:23) 경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깨달음에 선 자들을 위한 경계의 말씀이지 아직 연약하여 우리와 같은 지혜를 얻지 못한 자들을 판단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인 것이다.
오늘날도 절기에 대한 분쟁은 계속되고 있다. 어느 교회는 크리스마스나 부활절과 같은 일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으나 어떤 교회는 그러한 날들은 교회 역사 속에 가만히 들어 온 잘못된 관행으로 여겨 중히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이러한 판단을 해야 하는 동기가 무엇이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이는 모두 교만함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고전4:3,4) 하였고 “때가 이르기 전에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고전4:5) 권고하였다.
D. 성도의 주권(7-12)
바울은 계속하여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7,8) 기록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은혜와 목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하나가 되어 소망의 날에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것이다. 이에 바울은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9) 하였다.
죽은 자와 산자의 주가 되신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그 시사하는 바가 매우 오묘하다. 대부분의 우리는 주는 오직 산 자의 주가 되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도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자의 하나님이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말씀하실 때 하신 말씀으로 하나님은 살아 있는 자 속에 역사하고 계심을 언급한 것으로 이미 죽은 자는 그 생이 다하여 주의 판단에 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말씀 또한 주께서 산자와 죽은자의 주가 되심을 뜻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에 대하여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5:27-29) 하셨다. 이는 선한 일을 한 자나 악한 일을 한 자나 모두 주의 주권 속에서 주의 판단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후5:10) 증거하였다. 이 말씀은 믿는 자들도 불신자가 받아야 하는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가 행한 믿음의 결과에 따른 주의 판단을 언급한 것이다.
우리는 죽은자의 심판에 대하여는 계시록에서 보게 된다. 계시록 기자는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계20:12)라고 기록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장중에 있는 것이다.
또한 성경은 우리에게 판단에 관하여 세가지 지침을 전하고 있는데 이는 성도된 우리에게 허락된 판단의 권리에 대한 지침이다. 먼저 주님은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 (요7:24) 하셨으며, 두번째로 성도들의 범죄에 대한 문제에 대하여는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고전5:12-13) 기록하였다. 이는 교회 안에 들어 난 범죄를 꾸짖어 그 죄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하기 위한 조치이다.
세번째로 성경은 스스로에 대하여 엄격해질 것을 권고하여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11:31)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준을 두신 것은 우리의 믿음이 성도를 판단하는데 있지 않고 우리로 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케 되게하려하심이다.
계속하여 바울은 “내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엎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10,11) 증거하였다. 우리는 자신의 믿음에 관하여 너무 자고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도 아직 온전한 지식에 이르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세우신 다른 사람의 믿음을 판단하기 일수다. 만약 우리가 아직 남을 판단한다면 그는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자가 될 것이다.
II. 자유의 책임(13-23) – 형제 앞에 부딪힐 것을 두지 말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18)
A. 사랑을 떠난 또 다른 행동들(13-21) - 확실지 않은 일에 대한 논쟁
바울은 두번째 단락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는 자들의 책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책임이기도 하다. 먼저 그는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13) 증거하였다.
이는 지식을 가진 자들의 횡포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시험하는 교만한 마음이기도 하다. 나는 신학교 때 어떤 목사로부터 ‘당신은 구원의 확신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은 일이 있다. 솔직히 말해 그 당시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답변이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믿는 형제들을 찾아가 그런 식으로 질문을 하는데는 믿는 자들의 지식이 참으로 열악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아직도 여호와의 증인이나 구원파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믿는 자들을 미혹하고 있다. 당신의 이름이 과연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으며 당신의 구원의 확신을 말할 수 있는 증거를 성경으로 설명해보라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그 날이 언제인지를 말하라고도 한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말들이 아닐 수 없다. 내 영혼의 구원이 그 사람들에게 의해 판단을 받는다는 것 그 자체가 몹시 불쾌하기 짝이 없다. 바울은 여기서 이런 일들의 예를 미리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14절에서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느니라” 기록하였다. 여기서 속되다는 것은 레위기에 언급된 정결규례에 정한 부정한 식물들을 뜻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기서 개종한 근본적으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성도간의 마찰을 염두에 두고 있다.
계속하여 바울은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15) 하였다. 바울이 이처럼 먹는 음식물에 대하여 강력한 의지를 밝히는 것은 이러한 문제가 그 시대에 커다란 이슈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수많은 유대인들이 개종을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 들어 왔고 그들 중에는 바리새인과 제사장들도 상당히 많았다. 그들은 태어남으로부터 성경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던 자들로서 아직 신약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은 아직 구약의 가르침에 치중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복음의 은혜에 동참한 사람들이라 해도 태어남으로부터 터득하고 있었던 음식에 대한 규례를 쉽게 떨쳐 버릴 수 없었고 또 그에대한 성경적 규례도 지나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분명한 신학적인 규정을 해 놓지 않으면 교회 안에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큰 문제가 야기 될 것을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사도행전 10장에 기록된 이방인 고넬료 백부장의 전도 사건을 알고 있다. 그는 자기의 가족들과 함께 하나님을 경외하여 구제에 힘쓰는 경건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을 향한 그의 믿음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환상을 통해 그에게 욥바에 있는 시몬 베드로를 청하라고 명하셨다. 그때 베드로도 기도하고 있었을 때였는데 환상 중에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한 그릇을 보았는데 그 안에는 각색 네발 달린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이 있었는데 하늘에서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는 소리가 있었다.
이에 놀란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습니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습니다”(행10:14) 답하였다. 그의 말에 하늘로부터 “하나님께서 깨끗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소리가 있었고 이런 일이 세번이나 거듭하여 일어 난후 그릇이 하늘로 올라갔다. 베드로는 이 환상이 무엇인가 고민하고 있을 때에 고넬료의 하인들이 문 앞에 와서 베드로를 청한 것이다.
이에 베드로는 주께서 유대인된 자신의 고정관념을 깨우치시고 이방인에게 나아가기를 알리신 것으로 깨달아 그들과 함께 고넬료의 집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자 말씀을 듣는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고 놀라서 베드로가 말하여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행10장 참조). 이 일은 후일 안디옥교회에서 발생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교리적 분쟁에 증거되어 많은 논쟁 끝에 각 이방교회에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는 공문을 통하여 문제를 봉합하였다(행15장참조).
사실 사도 바울도 다른 사도들과 같은 유대인으로서 엄한 바리새인의 율법적 교육을 받은 사람이며 그 또한 율법의 엄한 규례를 따라 생활하던 사람이다. 사람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던 사상과 이념과 종교적 생활 습관들을 하루아침에 바꾼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원래 순복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십여년간 순복음이 지향하는 믿음의 신조를 신봉하던 열열한 순복음맨으로 오순절 계통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순복음식 오중복음과 성령운동에 강력한 신념을 갖고 있었던 내가 갈보리채플로 전향하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갈보리채플로 전향한 후에도 내게는 순복음식 신앙의식이 몸에 배어 있어 그 습관들을 털어버리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서울에 돌아와 갈보리채플을 개척했을 때 나를 따라 갈보리채플에 출석하게 된 나의 누님은 한 동안 순복음식 신앙습관을 버리지 못하여 새벽이면 여의도 교회까지 달려가고 순복음 구역장들과 어울려 구역예배에 참석하며 기도원을 찾았다. 몸과 마음은 갈보리채플에 와 있으면서도 행동은 순복음 사람들과 어울렸다. 그당시 그러한 이중적 신앙생활을 제지하던 내게 누님은 눈물을 흘리며 십여년간 순복음식 신앙관에 사로잡힌 것을 어떻게 하루아침에 벗어버릴 수가 있느냐고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 누님은 그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직 말씀을 듣고 지키며 장래의 소망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바뀌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다른 가르침에 흔들릴 수 없는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나는 최근 갈보리채플 성경공부에 참여하는 여러 교파의 성도들과 교제를 하고 있다. 그들 중에는 목사도 있으며 장로와 집사도 있고 또 아직 교회를 다니지 않는 초신자도 있다. 예전같으면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에 대하여 공방도 하고 또 갈보리채플의 신학적 노선에 대하여 강요를 할 것이지만 나는 오히려 느긋한 마음으로 그들과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 어떤 교파적 교리를 전달할 필요도 없고 또 그들의 교리에 대하여 비방할 권리도 없다. 나는 다만 내가 주께 받은 바 성령의 지혜를 따라 성경의 말씀을 전달할 바이다. 그들이 어떤 믿음을 가질 것인지는 결국 그들을 인도하시는 주께 있으며 그들도 온전한 지식에 이르는 날이면 나와 같이 자유함을 누릴 것이기 때문이다.
B.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자유
바울은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16) 하였다. 이는 그들과 논쟁 속에서 우리에게 있는 선한 하나님의 뜻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는 뜻이다. 얼마전 화요성경공부에서 나를 따르는 한 청년이 다른 교회에 출석하는 분들과 논쟁이 일어났다. 그들의 논쟁을 들어 볼 때 나를 따르는 청년의 말이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교회에 돌아와 눈물이 쏙 빠지도록 그 청년을 책망하였다. 그들과의 논쟁 속에서 우리가 아는 주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게 되며 아직 온전한 지식을 듣지 못하여 터득치 못한 그들에게 그 청년의 언행은 걸림돌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우리 모두가 한번쯤은 격어야 할 일들이다.
이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기뻐하심을 받느니라”(17,18) 증거하였다. 여기서 의는 온전함을 뜻하며 평강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화평을 뜻하며 희락은 주로 말미암는 기쁨을 말한다. 이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달아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릴 때 주어지는 지혜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을 쓰나니 식물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약 식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느니라’(19,20) 증거하였다.
주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은 아직도 먹는 것에 대하여 율법적 지식을 그대로 따른다. 수년전 나는 갈보리채플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유대계 목사를 한국에 초대하였다. 그는 먼저 한국음식을 대할 때 먼저 그 음식에 대한 재료를 나에게 물었다. 그는 한국의 명산 김치를 맛보고자 하였지만 김치에 젓갈이 들어 갔음을 알고 일체 먹지 않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신앙적 습관을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해서는 않된다는 것이다.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유대인의 식탁문화도 그들에게 신앙의 한 부분이요, 또한 그들의 율법적 규례와 관계없이 오직 믿음 안에서 음식을 대하는 우리의 믿음 또한 그리스도의 자유함에 거한 것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21)하였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안에서 자유함을 가진 자라도 음식으로하여 형제의 믿음에 의심을 갖게 해서는 않된다는 말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만일 식물로 내 형제로 실족하게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8:13)하였으며 제자 디모데에게도 일러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딤전4:3-5)고 가르쳤다.
C. 분별의 지혜(22-23)
끝으로 바울은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22)하였다. 이 말씀은 참으로 어려운 말씀이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기준에 대하여 자기를 책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는 정말 온전한 지식에 이른 자이기 때문이다. 이는 믿는 자 안에 있는 선한 양심에 대한 확고한 책임을 뜻한 것이다.
바울은 23절에서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기록하였다. 우리가 믿을 좇아 행한다는 것은 말씀에 대한 확고한 지혜를 뜻한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이 우리 안에 있어 성령의 지혜로 우리 양심이 선한 것을 따르면 그는 모든 것에서 자유함을 얻을 것이다. 후일 바울은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악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고전8:12) 요한도 “죄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일3:4) 증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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