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로마서강해

(로마서 15장) 영광에 이르는 성도의 삶

이요나 2008. 4. 3. 17:47

(로마서 15) 영광에 이르는 성도의 삶

 

(15: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영광된 삶을 위한 명제들을 설명하였다. 먼저 바울은 14장에서 형제를 판단하지 말것과 다른 형제를 넘어지게 하지 말라 권고 하였다. 오늘은 그 세번째로 자신을 기쁘게 하지 말며 서로 함께 좋은 것을 주고받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복음의 삶의 원리를 권고하였다.

 

I.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 (15:1-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3)

A. 자신을 기쁘게 하지 말라(1-4)

바울은 서두에서 우리에게 특별한 책임을 부여하고 있다. 그는 먼저 강한자가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 명한다. 여기서 강한 자란 복음의 일꾼으로서 사단의 괴계를 알아 오직 복음 안에서 온전한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을 뜻한다. 또한 연약한 자는 아직 복음의 충만한 지식을 얻지 못하여 채소를 먹어야 하는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의 초보를 가진 자들을 뜻한다. 바울이 우리에게 이러한 명령을 하는 것은 우리 역시 모두 그러한 과정을 거쳐 믿음의 시련과 연단을 받아 성령의 가르치신 신령한 것을 분변하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바울은 여기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는 먼저 복음의 깨달음을 가진자들의 교만함을 경계한 것으로 사람은 지식이 차고 신령한 것을 갖게되면 우쭐하여 사람들 위에 앉아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자기의 기쁨을 위한 수단으로 나타날 수 있는 인간된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하리라 (고전 8:13) 증거하였으며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전10:24) 하였고 다시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6:2) 권하였다.

 

바울은 2절에서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하고 하된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권고하였다.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운다는 것은 이웃을 향한 복음적 봉사를 뜻한다. 다시 말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를 희생하고 연약한 성도를 위해 선을 베풀며 그들 안에 선한 양심이 살아나도록 배려하라는 말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를 향하여도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살전5:11)고 명하였다.

 

바울이 이처럼 권고하는 것은 성도 안에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가 이웃들에게 나타나기 위함이다. 그로하여 바울은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시라 그에게서 온몸이 그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리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4:15-16) 권하였다.

 

3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하였다. 이는 시편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69:9) 하신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우리가 주를 사랑하는 그 열정만큼 대적의 비방과 훼방이 극심할 것임을 알 수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들을 말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8:9) 하였고 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2:5) 권하였다.

 

이와 같이 바울은 스스로 우리의 본이 되어 내가 그리스도의 본받은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전11:1) 하였으며 후일 자신의 자유을 말하여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처럼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고전9:19-20)라고 증거하였다. 이와 같이 바울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도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하심을 따라 우리를 위해 자신을 버리셨기 때문이다.

 

계속하여 바울은 4절에서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하였다. 이로보아 바울이 로마서를 쓰기 전에 이미 다른 서신들을 로마교회에 전달된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서신이란 이방의 각 지역교회들의 여러가지 문제점들과 온전한 믿음 생활을 위한 교훈들일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도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며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함이니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당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10:6,11) 증거한 바 있다.

 

B. 영적환경에 대한 정신적인 이해(5-7)

바울은 로마성도들이 담당해야 할 특별한 책임을 갖게된 영적 이유를 설명하여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으로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간구하였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바는 상반된 그리스도인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정신적 이해라고 할 수 있다.

 

4절에서도 언급된 인내와 안위와 소망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필연적으로 나타날 일들에 대한 계시적 권면으로 여기서 인내란 어떤 환경적 어려움에 대하여 막연히 참는 것만이 아니라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투쟁적 인내를 포함하고 있다. 다시말하여 성도들의 최상의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모든 것을 극복하여 달려나가라는 뜻이다. 또한 안위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확신하게 되는 믿음의 역사를 뜻한다.

 

다시 말하여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섭리를 깨닫게 되는 것을 말하며 소망은 그리스도의 날에 약속된 성도의 영광을 뜻한다. 바울은 이 위로와 소망을 얻기 위하여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18) 기원하였다.

 

바울이 말한 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아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사상은 에베소서나 빌립보의 주제이기도 하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4:3) 하였으며 빌립보 성도들을 향하여는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너희도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으라(2:2) 하였으며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2:14) 권고하였다.

 

바울이 여러 서신에서 계속 이와 같은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우리가 서로의 다른 점을 갖고 있어서 성도간에 마찰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아직 깨닫지 못한 심령들 속에서 화합지 못하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다른 점들을 인정하며 마음과 뜻을 같이 합할 때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C. 특수한 결과 (7-13) “서로가 받는다고 하는 것”

계속하여 바울은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7) 권하였다. 이는 우리가 한 마음 한 뜻을 이루어야 하는 원인로서 우리의 그리스도의 지혜의 깨달음 속에 나타난 영적 성숙의 증거이다.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 우리로 하나게 되게 하신 이유를 성경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또한 바울이 이러한 증거를 하는 데에는 그당시 교회 안에 당면한 문제들을 직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버리심과 이방인을 택하신 하나님의 비밀에 속한 계시이기도 하다.

 

사실 그당시 사도 교회가 당면한 문제는 전세계 가운데 세력을 갖고 있는 유대인들의 핍박과 훼방에 대한 교회의 태도이며 또 이미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들어 온 유대인들과 이방인들간에 야기된 다른 교리적 충돌이였다. 사실 이 문제는 쉽게 풀릴 수 없는 택하심을 따른 이스라엘의 역사적 배경과 그리스도의 나라에 속한 계시적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이미 9장으로부터 11장에서 유대인의 구원에 이르는 계시적 소망에 대하여 명확한 결론을 내린바 있었지만 문제는 교회 안에서의 성도간의 합리적인 이해를 통한 이성적 교류를 이루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였다. 오늘날도 우리가 서로 다른 교리적인 문제로 그리스도 안의 지체들과 서로 불편한 관계를 갖게 되는데 그 당시는 기독교로 개종을 하면 출교를 당하는 상황이였고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율법적 교리를 침범하는 그 어떤 교리도 용납하지 않았으며 그로하여 교회와 유대인들 간에 정통성 쟁점이 불게 되었다.

 

예수님은 사도들을 내보내시며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10:5,6) 하셨고 또  귀신을 내어쫓아 주심을 간청하는 이방 여인에게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15:24) 말씀하셨다. 그러나 후일 부활 후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천하로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15) 말씀하셨다. 분명히 이 둘 사이에는 서로 모순적 상황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말씀들은 그 상황적 배경이 사로 다르다. 먼저는육체로 이스라엘 속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이르신 말씀이며 후자는 부활후 이방인의 복음을 위해 열린 교회시대를 향하여 하신 말씀이다. 따라서 이는 각각 은혜받을 때가 다른 복음적 계시로서 하나님의 계획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 모두 하나가 되는 것을 시사하신 것이다. 이에 바울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함이라 (4:4,5) 증거하였다.

 

바울은 여기서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이미 성경의 계시로 선포되었음을 말하여 구약에서 4개의 성구를 인용하였다. 먼저 그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하신 시편 1849절을 인용하였다. 이는 다윗이 사울과 많은 대적들에게 승리한 후에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 것으로 다윗은 여기서 자기의 목숨을 대적에게서 구원하신 뜻은 열방 곧 이방 모든 나라 중에서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심이라 증거한 것이다.

 

계속하여 바울은 신명기 32 43절을 인용하여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증거하였다. 이는 모세가 임종의 가까움을 알고 성령으로 후일 이스라엘이 대적에게 훼방을 받게 될 때에 주께서 그들의 원수를 친히 갚으시고 그들의 죄를 속죄하여 그리스도의 은혜에 동참한 이방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게 될 것을 미리 말한 것이다. 

또한 바울은 시편117 1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증거하였다. 다윗은 성령 안에서 이미 그리스도의 날을 바라보고 열방과 백성들을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바울은 이사야 선지자로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11:1)하신 말씀을 인용하여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께거 다윗의 뿌리에 오실 것과 그로말미암아 모든 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둘 것을 증거하였다.

 

바울이 이처럼 구약에 기록된 말씀들을 인용한 것은 이스라엘과 이방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갖게 함이다. 그는 이를 말하여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3) 기원하였다.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자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소망과 기쁨과 평강을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성경이 증거하는 소망과 기쁨과 평강을 깨닫지 못하고 눈에 보이고 삶 속에서 얻어지는 현실 속에서의 평강을 기뻐한다. 그러나 오늘 바울이 증거하는 믿음 안에서의 소망과 기쁨과 평강이란 장차 우리에게 약속된 그리스도의 날에 이르는 소망과 기쁨과 그날에 누리는 우리의 평안이다. 그날이 이르기까지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극복하여야 할 것이다.

 

II. 당신의 목표가 무엇이냐(14-21)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14)

A.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

이제 바울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향한 소망과 기쁨과 평강의 믿음을 가진 우리의 목표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한다. 이는 하늘에 속한 약속과 성령의 인침을 받은 우리로 우리를 향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바울은 먼저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14) 기록하였다. 여기서 바울이 권하는 자라고 말한 것은  효과있게 봉사 또는 능력있는 교훈을 뜻한다.

 

이로서 로마교회는 이미 그리스도의 선한 능력과 지식으로 가득찬 성숙한 믿음의 성도들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말한 것처럼 로마교회는 마치 빈 항아리리처럼 큰 소리를 내던 부끄러운 교회였다. 이런 로마교회가 바울의 편지를 통하여 이처럼 놀라운 속도로 성장된 것은 정말 경이롭기만하다. 그러므로 오늘날 멀리 떨어져 있어 그리스도의 날에 이르는 복음의 메시지를 받지 못한다는 말들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몇 년전 나는 미국 갈보리채플의 한국인 형제들을 만난 일이 있었다. 그들은 내게 자신들은 친히 척 스미스 목사을 통해서 따끈한 복음의 메시지 듣고 있다고 자랑하며 당신은 어디서 그런 지식을 터득하였느냐고 물었다. 그들이 말하는 의도는 내가 영어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척 스미스 목사께서 가르치시는 갈보리채플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겠느냐 묻는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답하여 줄 것이 없었다. 나는 다만 나는 가르침 받음 것을 말하고 아는 것을 가르친다고 말하였다. 그것은 척스미스를 가르치신 분이 나를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15절에서 바울은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더욱 담대히 대강 너희에게 썼노니라고 기록하였다. 이 말은 아직 그들의 믿음이 그들이 확신하고 있는 믿음처럼 온전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여 지식 따로 행동 따로 놀고 있다는 말이다. 더욱이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더욱 담대히 대강 말한다는 말은 매우 의미 심장하다. 이는 너희 머리가 커져서 이런 말한다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너희가 나의 은혜 속에 있기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담대한 마음으로 몇자 적는다 한 것이다. 바울은 참으로 인내심이 많은 성숙한 지도자이다. 그는 고린도후서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을 길고하였다.

 

아무리 자식이라도 머리가 커 가정을 꾸리면 그들의 약점을 말하기란 쉽지 않다. 더욱이 아직 만나보지도 못하고 다른 제자들을 통하여 편지로 가르쳐 동일한 성령의 은혜 속에 진리의 믿음을 터득한 얼굴 모르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기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대강 말하겠다는 말에서 다윗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B. 복음의 제사장 직무

그들에게 바울은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음직하게 하려 하심이라(16) 증거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제사장의 입장에 있음을 언급하며 그의 제자들은 제물인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사실 제사장은 예언자와 달리 백성들 편에 있는 자로서 백성들의 죄사함을 위해 세우심을 받은 대리인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어 자신을 하나님께 죄의 제물로 드림과 같다.

 

여기서 바울이 그들을 향하여 이방인의 제물이라 칭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물은 그 제물의 규례를 따라 정결함과 예법에 소홀함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 제물이 온전치 못하여 하나님의 받음직 하지 못하면 그 제물은 제물의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것이 성령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음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말한 것이다.

 

여기서 성령 안에서라는 말은 그들이 성령의 증거하심으로 받은 믿음에 속한 모든 은혜가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가운데서 나타나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여 그들의 선함과 충만한 지식들이 오직 성령의 거룩하심 가운데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들의 거룩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바울은 17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라고 말하였다. 지금 여기서 바울은 이방인의 제물된 자신과 또 그의 제자된 자들의 사역의 범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그들에게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다 말한 것은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행한 하나님의 일 중에는 자랑스럽지 못한 것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들의 잘못된 일들을 논함에 있어 먼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일하고 있느가를 모델로 제사하여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와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18) 증거하였다. 이는 바울이 이방인의 위해 하나님께 제물로 드린 로마교회가 말과 일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이 효율적으로 드려지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먼저 말과 일을 거론한 것은 이는 성도와의 교제 속에서의 생활방법과도 관계가 있다. 나는 늘 이런 면에서 후회가 많다. 최근에도 성도들과의 믿음의 교제 속에서 내 말로 인하여 상처를 주는 일이 있으며 일하는 데 있어서도 많은 실수를 범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14절에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안다 한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또한 바울이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한 것은 사사로운 지식과 권위를 자랑하면 않된다고 말한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일하심을 따라 나타난 하늘의 능력과 성령의 나타나심 외에 불필요한 일들로 말거리와 일거리를 삼지 말라는 것이다.

 

오늘날 각 교회들이 하는 것을 보면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다. 서로 도토리 키재기를 하면서 새벽기도가 어떻게 전도폭발이 어떻고 아버지학교가 어떻고 쓸데 없는 일에 자랑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당연히 교회사역 가운데 있어야 할 일이지 자랑할 것들은 못된다. 어떤 교회는 새벽예배를 중심으로 할 수 있고 어떤교회는 전도폭발을 할 수 있는 것이지 교회가 행하는 가르침에 속한 일들은 자랑으로 삼을 것이 아닌 것이다.

 

솔직히 말하여 바울은 여기서 너희가 하는 일에 너무 생색내지 말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내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려함 (3:14)과 같이 너희도 나와 함께 힘을 합하여 이 일에 정진하자는 의미로 청하고 있다. 참으로 놀라운 겸손과 배려의 마음이 아닐 수 없다.

 

바울은 19절에서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하였다. 일루이곤이란 오늘날 알바니아로서 바울은 3차 전도여행시 마게도냐를 지나 남쪽의 아가야에 가지 전에 이곳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교회개척의 중요한 이슈를 기록하여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20) 증거하였다. 이는 로마교회 사역자들이 여러 곳으로 나아가 교회를 개척할 때에 특정지역에 힘을 쓰고 있었던 것을 지적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날로 어느 지역에 신도시가 생기면 그 지역에 로칼처치가 있던지 말든지 대형교회들이 교회개척에 힘을 쓰고 있다. 지금부터 10여년전 내가 이태원 지역에서 교회를 개척했을 때이다. 나름대로 부흥하고 있는 것을 본 미국에서 들어 온 한국인 사역자가 자기가 개척하던 곳을 접고 이 지역으로 옮기려 했던 일이 있다. 나는 그 당시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며 또한 갈보리채플의 사역지침이냐 그에게 물은 바 있다. 결국 그는 지방에 내려가 교회를 개척했으나 일년도 못되어 미국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III. 복음사역의 절정(22-33)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27)

 

A. 복음의 일치(22-29)

이제 바울은 그들과의 만남을 위한 의사를 말하여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서 일할 곳도 없고 또 여러 해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스페인)으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라고 기록하였다. 이것은 사실 바울이 마음 먹은 마지막 선교지로서 그 당시 로마제국의 가장 서쪽 끝에 위치하여 사람들은 세상 끝이라고까지 불렀다.

 

바울은 24절에서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를 하여 약간의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로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 기록하였다. 이 말은 로마교회에 대한 경의를 표한 것으로 그들이 스승의 사역에 대한 배려를 부탁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교제란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 사제적 교제를 뜻하기도 하며 약간의 만족이란 여행자로서의 최소한 혜택을 부탁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울이 이처럼 로마교회에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만을 요구하는 것은 또다른 사역적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계속하여 그는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25,26) 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모금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그리스도는 유대인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고 그의 교회 또한 유대인의 핍박과 훼방으로 전세계 가운데 흩어져 고난을 받고 있는데 바울은 오히려 예루살렘의 동족의 고통에 대하여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의 연보에 대하여 고린도후서에서도 언급하여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노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였다(고후8:2,3) 증거하였다. 또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고후8:7) 권하였다.

 

바울은 로마교회에도 이 일의 중대함을 말하여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27) 증거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헌금에 대하여 바른 지혜를 가질 필요가 있다. 물론 많은 성도들이 자기 교회를 사랑하여 모두 십일조를 드리고 또 많은 헌금을 힘껏 드리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교회 자체가 하는 일들을 보면 그 많은 헌금을 교회건축과 같은 것에 투자를 하고 있다.

 

나는 미국에 갈 때마다 각 미국 교회들이 이스라엘과 아프리카와 중동, 중앙 아시아를 위해 많은 헌금을 모으는 것을 보았다. 척스미스 목사는 노구의 몸을 이끌고도 매년 이스라엘 여행에 성도들을 이끌고 나선다. 그들의 이스라엘 여행은 단지 여행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서 복음사역을 하고 있는 지하교회들을 돕는 일이다.

 

나는 지금까지 서울 갈보리채플을 이끌어 오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져 왔다. 아직 자립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나와 복음의 교제를 하고 있는 몇 사람들로부터 우리의 부족함이 채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늘 고마운 마음 뿐이며 오직 내가 바라는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신령한 것이 함께 공유하게 되기를 소망할 뿐이다. 이와 같이 바울은 영적인 공유와 또 육신에 속한 일에 이르기까지 복음적 교류가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말하며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하였다. 이는 바울의 권고에 동참한 그들에게 임하실 복음의 열매를 말한 것이다.

 

 B. 복음을 위한 중보

30절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30-32) 하였다.

 

이는 마치 유언과도 같다. 사실 바울은 로마에 들어가서 사도의 마지막 생을 마감한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 “나와 힘을 같이 하여  힘쓴다(strive)는 말은 바울의 믿음의 정점인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3:14) 말한 바 “쫓아 가노라”와 같은 맥락이다. 다시 말하여 그 힘쓰는 일이 오직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따라 하늘에 있는 상급을 좇아 가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 땅의 모든 복음 사역자들이 함께 기원하는 소망이기도 하다. 바울은 끝으로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하였다. 이제 우리는 다음주로 로마서를 마감하게 된다. 그동안 여러 달에 걸쳐 함께 공부한 로마서가 여러분 믿음생활에 큰 도움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