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한음성

1948년 정월 스무이틀

이요나 2002. 6. 22. 20:00

1948년 정월 스무 하루 저녁이었다. 날이 어두면서부터 창호지 문풍지 사이로 바람이 떨고 있었다. 검둥이는 눈발을 치세우는 바람찬 소리에 검둥이는 꼬리를 내린 지 오래 된다. 새까만 단발머리를 바싹 올려 깍은 4살배기 경자의 저녁 밥상머리에는 바깥 날씨보다 을씨년스런 어미의 무표정이 흐르고 있었다.


화롯불에 바짝 쫄아붙은 뜨거운 된장 뚝배기를 상위에 메어치며 "아이구 지겨워 니 애비는 오늘밤도 신선노름인게여! 냉수 그릇에 달아오른 손가락을 당구는 어미의 푸념이 애처러운 듯 어린 경자는 숫가락을 뜨지 못하고 있다.

 

"아니 너는 밥 안 먹고 뭐하고 있어!" 귀청이 나가는 소리에 경자의 숫가락은 정신 없이 뛰기 시작했다. 아빠가 돌아오지 않는 날이면 늘 겪어야 하는 일이기에 엄마의 부아린 눈도 거슬려 오지는 않았다. 다만 경자는 엄마의 된장 뚝배기에 데어서 벌겋게 달아오른 손가락이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엄마는 숨을 몰아쉬며 무명치마 위로 솟아 오른 배를 쓰다듬으며 힘든 몸을 벽에 바치고 있었다. 문풍지를 흔들고 들어오는 겨울바람을 바라보는 엄마는 지긋이 눈을 감은 채 말이 없다. 등잔불 사이로 움찔 놀라는 엄마의 얼굴은 배를 걷어차는 태어날 아기의 발길질에 눈살을 찔끔거리면서도 내심은 즐거운 표정이다.

 

"이놈이 분명 아들인게여. 아이구 이놈아 살살해라 에미 죽겠다" 자지러지듯 이불더미 위로 누워버리는 엄마의 모습에 이젠 마음을 놓은 경자는 "엄마 손 불어줄까? 애기가 또 차?" 경자의 고사리 손은 어느새 엄마의 어깨를 주무르고 있었다.

 

경자가 네 살 되던 날 새벽 그러니까 설을 센지 꼭 스무 이틀 되던 날 한 밤중이었다. 침을 흘리며 골아 떨어진 경자가 잠에서 깬 것은 아직 새벽닭도 울기 훨씬 전이었다. 생베 찢어나가는 엄마의 울음소리가 꿈결같이 들리는 가운데 던져진 아빠의 베개 덩이가 경자의 발치를 내려치면서 "아이구 경자야! 엄마 죽는다!"

 

자다가 홍두깨를 만난 듯 벌떡 일어난 경자는 도저히 상황이 납득되지 않는 모양이다. 무엇이 무엇인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종종 걸음을 치며 먹다 남은 밥상이 밀쳐진 윗 묵으로 올라붙은 후에야 엄마가 온 방안을 헤매며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경자야 빨리 정수 할머니 불러와 어서 착하지" 머리가 산발이 된체 이를 악물고 문고리를 잡고 악을 쓰는 엄마의 얼굴은 온통 땀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날이 어두면 검둥이의 새파랗게 독오른 눈빛이 무서워 문도 못 열어 보는 경자였다.

 

 방안의 흐트러진 사정으로 보아 엄마가 방안을 도리질 한 지 꽤 된 모양이다. 안채의 작은 엄마의 집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밤은 중천에 깊어 있었다. 문 꼬리를 잡은 채 벌벌 떨고 서있는 경자를 향해 엄마의 부릅뜬 눈이 달려들었다.

 

"아이구 이것아 뭐하냐 엄마 죽는다!" 순간 경자는 오늘밤의 엄마의 눈빛은 검둥이의 시퍼런 불보다도 더 무섭게 느껴 왔다. 경자는 엄마의 고함소리도 채 끝나지 않았을 때 이미 문밖을 나와 서 있었다.

 

콧등을 쳐오는 겨울 밤 찬바람이 오히려 경자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경자의 깡통치마 끝에서 꼬리를 살래 흔드는 검둥이의 시퍼런 눈빛은 오히려 다정스러워지는 밤이었다. 이제 대문의 빗장을 열어야 한다. 그리고 앞마당의 뒷간 앞을 지나 또랑을 건너 언덕바지에 붙은 정수 할머니 집까지 뛰어야 한다.

 

 멀지 않은 길이지만 경자의 머리 속에서는 하늘만큼이나 멀어 보였다. 아빠를 찾는 엄마의 울음소리는 겨울바람을 더욱 차게 내리치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안채에 코를 골며 잠들어 있는 작은 엄마의 방을 꼰아 보던 경자는 이를 악물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대문 빗장을 열어 댕겼다. 검둥이가 끙끙거리며 깡통치마 옆으로 바짝 다가서 주었다.

 

평소 같으면 질색을 하던 경자였지만 지금은 아빠의 가슴만큼이나 든든했다. 빗장이 빠지기도 전에 앞산을 휘몰아 온 들 바람이 한꺼번에 밀쳐 들며 대문을 밀어 제치는 바람에 네 살배기 경자의 작은 몸은 검둥이 위로 딩굴러 버렸다.

 

간이 지옥까지 떨어지는 무서움을 느껴지는 순간에도 경자의 여린 가슴속에는 고사리 같은 목소리가 울먹이고 있었다. "엄마 죽지마 엄마 죽지마" 그 날 밤 경자의 남동생 희진(熙眞)이는 이렇게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