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디모데서강해

(딤후1:12)부끄러워 하지 않는 믿음

이요나 2005. 6. 1. 14:46
(딤후1:12)부끄러워 하지 않는 믿음 [MP3]

(딤후1:12)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이제 디모데 후서를 공부할 차례입니다. 우리는 디모데전서에서 차세대 목회자인 젊은 목사 디모데에게 복음사역과 교회치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들을 열거하며 권면하였습니다. 바울은 제일먼저 다른 교훈과 변론을 내는 자들을 경계하게 하였으며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없는 믿음에서 나는 사랑을 실천하라 하였습니다.

또 세우심을 받은 감독자로서 교회 장로와 집사들을 세움에 있어서 깨끗한 양심의 비밀을 가진자들을 세우며 교회안에서 여자들의 나섬에 대하여 아주 엄중하게 경계하며 경건의 비밀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한 경건의 비밀란 성도의 온전한 믿음 생활 속에 나타난 하나님께 속한 신적 신비를 말한 것입니다.

그후 2년정도의 세월이 흐른 후 바울은 다시 로마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지난번에는 감옥에 갇히기는 했으나 셋집에 거주제한을 받으며 자유롭게 복음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포악한 황제 네로의 집권 말기로서 네로의 로마화재를 그리스도인에게 전가하므로 대 박해가 일어났던 시기입니다. 바울은 지금 토굴에 갇혀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바울은 죽음을 앞에두고 그동안 디모데와 함께 목숨걸고 개척한 이방 교회를 이끌어갈 차세대 목사인 디모데에게 다시금 편지를 보내야만 했습니다. 바울이 잡힌후 로마의 정세는 급변하여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하였고 유대인들과 신비주의자들의 미혹과 그리고 교회 안에 종말론자들과 같이 진리를 벗어나 새로운 교리를 도입하여 교권를 장악하려는 무리들이 새롭게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약속
바울사도는 1절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 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하였습니다.

바울은 먼저 '생명의 약속'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생명이란 영원성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것은 어원적으로 죽음의 반대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약속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망의 권세 속에 구금된 죄의 인간을 해방 시키는 자유의 문이며 모든 생명체들의 최고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8:20-21)증거하였습니다. 

바울은 제자 디모데를 아들이라 호칭하므로 그 생명의 약속이 아버지로부터 이어지는 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내가 하는 모든 말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고 들은 것이라 하셨습니다, 또한  바울이 새삼스럽게 그 후계자 된 디모데에게  '생명의 약속'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은 그의 인생의 끝이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4장 6절에서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기록하였습니다.

 청결한 양심
바울은 2절에서 디모데에게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기원하였습니다. 바울이 다른 편지에서는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였는데 여기서는 '긍휼'이란 단어를 더 삽입한 이유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없이는 온전한 믿음의 경륜을 성취할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그의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위임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 외에 그의 크신 자비와 동정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3절에서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라 기록 하였습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의 토굴 속에서 육신의 종말을 목전에 두고 밤낮 쉬지 않고 후계자 디모데를 위해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란 우리가 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성취할 수 있는 최선의 문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힘으로 복음을 성취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이 일을 맡기셨기 때문에 내가 해야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의 도구로서 오직 기도로 예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요14:13)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기도일 뿐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먼저 청결한 양심을 요구하였습니다. 그 조상들로부터 지금까지 복음을 위해 세움을 받은 사람들은 순수한 양심으로 믿음을 성취하였기 때문입니다. 양심이란 하나님께서 인간의 선한 삶을 위해 인간의 혼신 속에 두신 마음으로 양심의 열쇄는 그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무엇을 하던지 양심의 선택을 하여야 하며 그 결과를 책임져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청결한 양심으로 헌신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비롯하여  주를 위해 세움을 받았던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을 언급하였습니다. 바울은 지금 믿음의 선도들의 청결한 양심이 자신들에게 이어져 내려 온 것을 감사하며 그 양심이  복음의 아들이며 위탁자인 디모데에게 그대로 어어지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없는 믿음
바울은 4절에서 "내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하려 함이니"라고 기록 하였습니다.  바울은 지난 날 디모데와 함께 복음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때를 회상하며  다시금 그를 만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바울은 '이는 네 속에 있는 거짓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증언하였습니다. 이처럼  의로운 일을 위해 목숨을 같이 했던 친구를 사모하는 것은 신뢰의 믿음이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이러한 믿음에 대하여  "이는 네 속에 있는 거짓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 확신하노라"하였습니다. 디모데는 원래 유대인의 어머니와 헬라인의 아버지 사이에 소아시아 루스드라에서 태어났습니다.

오늘이나 예나 이방인들과 결혼하여 외국에서 살면서 온전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데모데가 민족과 언어와 문화와 삶의 환경과 조건이 전혀 다른 헬라에서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믿음으로 삶을 지켜온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이어진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부모를 두었다는 것은 커다란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믿음의 뿌리는 혈통과 관계 된 것은 아닙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겼느냐가 중요합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가 이방신을 섬겼다고 기록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데모데가 그의 모계로부터 어떤 교육을 받고 살아 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안수
그러나 이것으로 그 믿음이 온전한 것은 아닙니다. 복음의 믿음은 성령의 나타나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6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나게 하노니"하였습니다. 따라서 디모데가 그의 어머니로부터 거짓없는 믿음을 전수받았다면 바울이 안수함으로 그 믿음이 표출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도 이러한 의식을 통하여 목사를 세우고 있습니다만 바울은 디모데전서 4장 14절에서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없이 말며"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안수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사역자의 머리에 손을 얹어 하나님의 은사가 임하기를 기원하는 종교적인 의식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디모데의 상황과 그 심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아직 디모데가 잘못된 길로 나간 것은 아니지만 그 당시 세태가 디모데의 굳은 믿음을 혼란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복음의 열정에서 소연해져 가고 있는 디모데의 현실을 직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키우매 있어 정말 잘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깜박하는 사이 세상속에 휘말린 우리 자녀들은 걷잡을 수 없는 깊은 곳으로 떠내려가 있습니다. 그때 많은 부모들이 방을 동동거리며 기도하지만 그 영혼이 주 앞에 서기까지는 많은 시행착오와 세상의 경륜을 거쳐야만 합니다. 따라서 악으로부터의 경계는 세상이 아직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 전에 기도와 경책으로 권면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끄러워 말라
7절에서 바울은 이러한 데모데를 향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하였습니다. 바울은 지금 걷잡을 수 없이 달려드는 세상의 위협에 두려움으로 가득찬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그의 부르심을 향하여 달려가는 믿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계속하여 바울은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디모데의 마음을 연약하게 하는 또 하나의 원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계속되는 바울의 고난이었습니다. 진리를 벗어난 자들은 오히려 기세가 등등한데 비하여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은 사도의 위엄과 권위는 고사하고 저주받은 자처럼 토굴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글을 보며 나를 부끄러워 하며 떠난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하게 됩니다. 나는 지금까지 오직 성경전체를 바르게 가르쳐야 한다는 갈보리채플의 목회이념을 따라 성경강해와 주해를 고집해 왔습니다. 그러나 10년이 넘도록 부흥하지 못하고 초라한 모습을 살아가는 나의 모습은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거룩한 부르심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한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하였습니다. 그렀습니다. 우리의 부르심은 사람으로부터 온것이 아닙니다. 만약 내가 사람으로부터 세움을 받았다면 나를 세운 자가 멸망받으면 함께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부르신 것은 거룩한 부르심입니다, 만세전에 예정하신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역사하는 능력은 하늘과 바다와 이 땅의 모든 만물과 살아 있는 모든 영혼을 지으심 하나님과 그 아들을 살리신 권세와 능력이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뜻이며 그 아들 안에 거한 영원한 생명인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을 것은 사망과 살리심의 권세가 오직 그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반포자
바울은 11절에서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하였습니다. 반포자란 전쟁 중에 군사를 모으는 자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반포자는 목숨을 내놓고 외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비난도 받을 수 있고 핍박을 감수해야합니다. 또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사도로서 성도들에게 교사로서 복음의 진리를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 하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을 부르사 사도와 교사로 삼으신 그 분이 누구인것을 알기 때문이었고 또한 자신의 영혼의 의탁자가  누구인 것과 영혼의 결국을 확실히 알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이제 바울은 디모데에게 다시 권면하여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하였습니다.

많은 사역자들이 의기 소침하여 자신이 사역자 된 것을 부끄러워 할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개척교회 사역자들은 참으로 부끄러움이 많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됨이 나로말미암지 않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택하심과 부르심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우리는 어디서나 당당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의기소침해진 그 원인 중에 하나인 자신의 떠난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이사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하였습니다. 아마 이 두사람은 디모데도 잘 아는 사람 같습니다. 아마 그들만큼은 바울을 떠나지 않고 지킬 것이라 맹세했던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중에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 합니다

16절에서 바울은 "원컨데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업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을 매인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며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하였습니다. 18절 말씀으로보면 오네시보로는 에베소 성도였음이 틀림없습니다. 혹시 이 사람은 빌레몬서에 나오는 빌레몬의 종이였던 오네시모인지도 모릅니다. 후일 오네시모는 에베소의 감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울은 여러가지 주변 사정으로 의기소침해진 디모데에게 또 다른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나 부모들은 모두 지나간 시대의 사람들이지만 오네시보로는 현제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이며 디모데와 함께 바울을 따르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주께 간구하여 (원컨데 주께서 조로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주석을 달아 기도한 것은 그와 그의 가족이 바울을 섬기기 위해 어떤 희생과 고난을 감수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토굴 속에 갇혀 있는 중죄인을 돌본다는 것은 자기의 생명을 포기하여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나의 달려 온 길에 대하여 부끄러워 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나를 세우시고 붙드신 분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의 성령이 내 안에서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제 그의 기쁨으로 담대히 복음을 위하여 달려 나갈 것입니다. 주여 도와 주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