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디모데서강해

(딤후3:14)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이요나 2005. 6. 29. 12:24
(딤후3:14)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딤후3:14)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우 것을 알며

디모데후서 3장입니다.  바울은 2장에서 디모데에게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자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쓰라'하며 종말을 사는 사역자로서 명심해야할 일들을 가르쳤습니다. 날이 갈수록 주의 오심이 가까워지는 때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음행에 빠지고 무식한 변론을 일삼고 있습니다. 이제 바울은 종말에 교회 가운데 나타날 일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1절에서 "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하였습니다. 이것은 종말의 시대에 나타날 세상의 조짐들을  말한 것으로 바울은 먼저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삶의 관계에서 자기 중심적 생활로 돌아 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주를 믿는 우리에게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세상은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함께 부르신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함을 가르친 말씀입니다.

그런데 종말이 가까우면서 제일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육적인 현상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욕정을 위해 살아가게 되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것과 필수적으로 함께 나타나는 것은 돈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의 재물관에 대하여 엄격한 경계를 했습니다. 바울은 탐심은 일만 악의 뿌리라 하였으며 재물은 우상숭배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벌써 사람들은 자기 욕정에 노예가 되어 물질의 노예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계속하여 바울은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않는다 하였습니다.

여기서 자긍이란 원래 방탕을 의미하는 말로서 여기서는 남들을 모함하는 사기꾼이나 협잡군을 말한 것입니다. 돈을 모으려니 온갖 협잡을 부릴 수 밖에 없고 그 결과 사람들은 여기저기 방랑을 일삼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결국 교만해져서 충고를 하는 부모의 말을 거역하고 감사하는 마음에서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여기서 두려운 말씀은 거룩하지 아니하다는 말씀입니다. 거룩함이란 성도로서의 자질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룩함은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신성인데 그 거룩함은 우리의 믿음 가운데 역사하는 성령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자기와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면 벌써 하나님에게서 조차 떨어져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여기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3절에서 바울은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성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대인적인 관계에 미치는 영향이 되겠습니다.

무정함이란 인간의 본디 갖은 감정에서 떨어져 나갔다는 것이며 또한 원통함을 풀지 않는다는 것은 사소한 일에 감정적인 대립을 갖는다는 말씀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참소라는 말은 '디아불로스'로서 남을 중상하고 모함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 바울은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세가 될수록 사람들은 마치 짐승들처럼 이성을 잃고 말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계속하여 바울은 4절에서 "배반하며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 보다 더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감정적인 부분을 언급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우리가 찬양을 들으면 마음이 기뻐져 하나님을 사모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쾌락을 일삼게 됩니다.

바울은 5절에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 서라"하였습니다. 여기서 경건이란 믿음의 성품과 모양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앞에서 한  도는 말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한 것이 아니라 믿는사람들에게 한 말인 것입니다.

분명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야 선한 마음과 사랑이 삶 가운데서 나타나야 하는데 장로 집사로 불리면서도 하나님의 거룩함과 선한 마음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목요모임을 이끌어 오면서 재소자 돕기와 불우 이웃을 돕는 일에 관심을 갖어 왔습니다. 그런데 최근들어 내가 하고 있는 일의 무익함을 느껴왔습니다.

사실 목요예배에 나오는 형제자매들은 우리교회 성도들이 아니라 결혼을 하기 위해 배우자를 찾기 위해 나온 사람들입니다. 지금까지 모임에 열심히 나왔던 사람들은 모두 이상형을 만나 결혼을 하였습니다.  최근 우리 모임 가운데 운영자로 봉사하다가 결혼한 형제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에게 간질증세가 발견되어 그 부부가 눈물로 고통을 받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그 형제는 우리 모임 가운데 처음부터 함께 하던 형제로서 그 형제는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힘들게 결혼을 하였습니다. 나는 그
형제를 조금이나마 돕기 위해 우리 모임에서 그 아들을 돕기 위한 모금운동을 벌렸습니다. 그러나 예상밖으로  그와 함께 믿음 생활을 하여 결혼을 하고 자녀들까지 갖은 수많은 동료들이 더욱 냉담한 것이였습니다.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였습니다.
나는 만약 그들의 아이들에게 문제가 있어도 똑같은 마음을 갖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자기들간에 먹고 마시는 일에는 늘 흥겨워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들도 언젠가 말세의 고통을 격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때 나는 그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두렵습니다.

바울은 6절에서 "저의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룰 수 없느니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어리석은 여자'란 작은 자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여자에 국한 된 말은 아니지만 여기서 바울이 어리석은 여자라 칭한 것은 남자들도 점점 어리석은 여자들처럼 소심하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요즘 여호와의 증인이나 또 문선명이의 집단들이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든지 자신들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은 빠져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얼마전 나는 이상한 전화를 받았습니다. 어느 여자가 전화를 걸어와 가정생활과 부부간에 유익한 지식과 정보를 알려 주고 싶어서 전화를 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 소속을 밝혀야 하지 않겠는냐 하였더니 혹시 교회를 나가느냐고 물어 왔습니다. 네가 그렇다고 하니까 성경에는 아름다운 가정을 위한 좋은 말씀들이 있는데 교회에서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성도들이 잘못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였습니다.

나는 직감에 통일교 교도라고 생각하고 성경의 어느 부분을 보고 있느냐 했더니 창세기 2장의 아담과 하와의 말씀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천년 왕국을 세울실 메시아이신 것을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그 문제는 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라 말하는 것이였습니다.

예수는 이미 죽었고 이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할 메시아가 왔는데 그는 가정의 평화를 중심으로 이미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문선명이를 구세주인줄 믿고 있는 것입니다. 또 여호와의 증인이나 이만희의 신천지 교회나 모두 여러가지 방법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이단들의 특성을 보면 모두 어떤 지식들을 갖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도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교육을 받아서 그 약점을 갖고 먼저 감성적인 여성들을 유혹합니다. 여인들은 하와와 같이 감정에 휘말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은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다"하였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특성 중 하나는 여자들 중심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떼를 지어 여기저기 세미나에도 참석을 하고 성경공부 모임이나 기도모임 산상집회를 다니기도 하는데 그 여인들의 모습을 보면 참으로 화려하고 또 믿음의 여인들 같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사실은 무엇인가 자랑하고 싶고 무엇인가에 휘말리고 싶어서 다니는 여인들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여인들을 유혹하는 잘못된 사람들을 얀네와 얌브레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마술사들로 모세를 대적하던 자들입니다. 주의 사역자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악한 사자의 도구가 되어 술수로 여인들의 마음을 모으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특성을 말하여 진리를 대적하는 자요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하였으며 그들은 더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그들의 어리석임은 곧 세상에 들어날 것이라 하였습니다. 오늘날 얼마나 그릇된 사람들이 교회와 기도원을 순회하며 그릇된 일들을 일삼는지 모릅니다.

기도원은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는 곳이 아니라 이제는 여러가지 술수로 질병을 치료하는 곳으로 전락하고 있으며 사역자라는 사람들은 침술과 기치료라는 여러가지 방편을 갖고 여인들을 유혹하고 있으며 심리 상담과 최근에는 웰빙목회라는 방편까지 들고 나오고 있습니다.

바울은 10절에서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거 당한 일과 어떠한 핍박을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같은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실한 사역 가운데 나타나는 믿음의 표적들 즉 교훈과 행실과 생각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인내가 나타나야함을 알게 됩니다. 또한 그러한 믿음의 표적들은 늘 고난과 핍박을 통해서 나타나데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믿음의 증인들이 모두 받은 고난이었습니다.

바울은 처음 데모데를 루스드라에서 만나 그의 신실한 믿음을 보고 안수하여 제자로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디모데는 바울이 복음을 위해서 받아야했던 고난과 핍박을 너무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하였습니다.

참으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위안이 되는 말씀입니다. 아마 이 글을 받은 디모데는 이 편지로 하여 자신이 받는 고난과 핍박이 얼마나 귀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역을 하다보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어느 사람들은 사역자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는데도 그들의 목회는 매우 잘 되는 것 같고 어느 목사는 정말 경건하게 믿음을 지키며 사는데로 지지리도 않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은 복음으로 인하여 핍박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씀이 아닐수 없습니다.

바울은 계속하여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해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온전한 믿음은  누구에게서  무엇을 어떻게 배웠는가에 따라 그 경건의 진리가  나타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이제 위대한 선언을 합니다.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하였습니다. 여기서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다는 것은 성경이 터득되는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초등학교 때에는 초등학교에 맞는 지식과 상식의 범위를 갖게되는 것과 같이 성경은 하루 아침에 깨우칠 수 없음을 언급한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우리가 성경을 배울 때 우리의 믿음은 예수를 떠나지 않고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터득하게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아닌 다른 것을 가르치는 자들을 경계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여호와의 증인이나 몰몬교 그리고 문선명의 교회들은 우리와 같은 성경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성경을 자신들의 교리에 맞게 고쳐서 경전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경전을로 가르침을 받게 되면 예수를 상실하게 되고 예수의 자리에 자신들이 서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16절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하였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역자들을 통해서 성경이 쓰여졌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 속에 역사하신 성령이 기록한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진리의 도로 교훈하여 잘못된 것을 책망하고 잘못한 행실을 원래의 자리로 되돌리기 위한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바울은 성경의 목적에 대하여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하였습니다. 오늘날 과연 성도들의 거룩한 행실과 온전한 믿음의 생활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들을 가르친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살펴 보고 싶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음주에 디모데 후서 마지막 장을 공부하게 되겠습니다. 말씀 가운데서 평안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