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디모데서강해

(딤후4:22) 바울의 유언장

이요나 2005. 7. 4. 10:09
(딤후4:22) 바울의 유언장

(딤후4:22)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하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이제 디모데후서 마지막장입니다. 바울은 1절에서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바울의 임종이 매우 가까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말하여 예수님을 앞에 두고 유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땅의 모든 인간을 판단이 예수께 있음을 다시 언급한 것이며 예수의 재림과 장차 이 땅에 펼쳐질 천년 왕국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하셨으며 다시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하셨습니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오늘날 우리 가운데 이처럼 명백함에도 이 말씀을 믿지 않으려 부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들이 받을 심판이 심히 두렵기만 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다 반듯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그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성경에 약속하신 대로 오실 것입니다.

 I. 말씀을 전파하라
바울의 첫번째 명령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던지 못 얻던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하였습니다. 여기서 말씀을 전파하라는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말과 말씀을 전파하라는 말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같은 말입니다. 복음이 말씀이고 말씀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씀이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전파'라는 말과  '가르침'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전파라는 것은 믿는 않는 사람을 포함한 모든 대중에게 말씀을 전달하는 것을 말하며 가르침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믿는 자들에게 말씀을 풀어 가르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전파와 가르침은 그 성격상에 차이가 있습니다만 여기서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은 목회자의 설교가 말씀 즉 성경을 떠나면 않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인테넷에 올라 온  목사들의 설교를 들어 보게 되는데 목회 연륜도 적은데 성공을 했다는 목사들의 설교를 들으며 아연실색하게 됩니다. 으리으리한 강단에 화려한 복색을 차려입고 현란한 제스츄어와 빠른 입을 통해서 불을 토하듯이 쏟아지는 그의 설교는 관중을 휘어잡고 있는 바람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그는 온 힘을 다해 복음을 전한다고 열변을 토하고 있는데 나는 그의 설교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도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도 아닌 자기의 말인데도 그의 말끝마다 아멘 아멘하고 앵무새처럼 되뇌이는 성도들을 보면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 항상 힘쓰라
바울은 말씀을 전파함에 있어 몇가지 단서를 달았습니다. 먼저 때를 얻던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을 전파할 때를 얻는다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음을 전재한 것입니다. 또한 항상 힘쓰라는 것은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항상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많은 목사들이 설교 준비에만 급급할 때가 있습니다.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살피고 공부를 하여 성경속에서 하나님과의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목사들이 설교 준비만을 위해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은 설교 준비하라고 우리에게 주신 것은 아닙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 그의 사자들을 통해서 기록하신 것으로서 오늘날 우리 사역자들을 부르신 것은 먼저 우리로 성경의 말씀을 충분히 검토하고 성령의 깨우침을 통하여 그  말씀하신 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살펴 몸소 행하여 부르신 주의 자녀들에게 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더구나 최근에는 컴퓨터가 발달되고 수많은 설교자료들이 인터넷에 판을 치고 있어서 힘 들이고도 유명한 목사들의 설교 원고를 발취하여 그대로 전할 수 있습니다. 어떤 목사들은 원고 하나도 바꾸지 않고 다른 목사의 설교를 카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게 그들이 발취한 설교들을 보면 모두 자기가 성도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설교의 목적을 따라 설교를 선택하게 되므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성도들에게 전하고자 하신 말씀이 아니라 목사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준비한 설교라는 것입니다.

   2. 오래 참으라
바울은 두번째로 "범사에 오래 참으라"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목회 선상에 펼쳐진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라 한 것입니다. 여기서 오래 참으라는 말은 사람에게만 속한 말로서 어떤 상황에 대한 인내와는 또 다른 의미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라도 우리의 삶 가운데서 만난 복음을 전할 사람들에게 오래 참으라 한 것입니다. 

  3. 가르침으로 경책하라
세번째로 바울은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가르침이란 성경 말씀에 대한 가르침을 말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어떤 잘못을 책망하되 너의 말로 하지 말고 성경을 통해서 책망하고 경계하고 권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책망이란 말은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여 부끄럽게 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의 잘못을 발견하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도 아니며 또 자신의 말로 다스리라는 말도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으로 경고하고 책망하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예수를 믿은 지 10여년이 지나도록 내 삶의 방법에 대하여 성경의 말씀을 들어 책망을 하는 목사들을 한 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성경의 말씀은 커녕 세상적인 삶의 입장에서도 책망을 해주는 목사가 없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던지 술집이라도 그것은 복음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 하였습니다. 참으로 황당한 일입니다. 그러나 내가 인도함을 받아 성경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때 성경은 나의 그와 같은 생활과 생각들에 대하여 엄중하신 경고와 책망으로 나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II. 직무를 다하라(5절)
바울 사도의 두번째 명령은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하였습니다. 바울은 여기서도 세가지 사항을 언급하여 먼저 '모든 일에 근신하라'하였습니다. 이것은 목회자의 부지러한 삶 전체를 의미한 것입니다. 

 
1. 근신과 고난
계속하여 바울은 '고난을 받으라"하였습니다. 이 말은 모든 일에 게으르지 않고 일을 하되 그 일과 함께 부여되는 고난을 피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나는 목회를 시작하면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동참으로 하여 내일을 도와 주었습니다. 그때는 나는 설교 준비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최근들어 나는 세끼 먹을 밥과 방 청소는 물론 교회 화장실 청소에 이르기까지 내가 다 해야만 합니다. 손님이 오면 차 시중도 들어야 하고 전화 상담도 받아야 하고 또 결혼식과 장례식장에도 가야하며 설교준비도 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정말 고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전도인의 직무
세번째로 바울은 '전도인의 일을 하라"하였습니다. 여기서 전도인이란 말씀을 전할 자로 부름 받은 직책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어떤 경우라도  복음을 전할 전도자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여 무엇을 하던지 전도인으로서 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아굴라 가족과 함께 장막을 치면서 전도인의 직무를 다하였습니다.

마가복음 1장을 보면 예수께서 회당에서 복음을 가리치기 시작하자 귀신들린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이 몰려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주께서 어디로 욺직이기 조차 힘들 정도로 아침부터 사람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침 일찍 일어나 기도하신 후 '우리가 다른 마을로 가자 내가 거기서도 전도를 하리니  이를 위해 내가 왔다' 하셨습니다.

  III. 말세의 교회의 풍조
바울이 이처럼 디모데에게 '말씀전파'와 '복음 전도인의 직무'를 다하라고 명령한 것은 말세에 나타날 교회의 풍조와 관계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3절에서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하였습니다.
 
   1. 교리적 갈등
바울 사도가 언급한 교회의 풍조 중 첫 번째는 '교훈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교훈이란 '건전한 교리'를 말한 것입니다. 제가 갈보리채플을 개척하면서 나름대로 많은 사람들이 제자가 되기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안되어 다른 길로 나갔습니다.

한 때 나를 가리켜 주께서 인도하신 세상에 둘도 없는 스승이라고 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나의 가르침에 대하여 의심을 갖고 대항하려 합니다. 한번 예수를 믿으면 그가 무엇을 하던지 간에 영원한 구원을 받았다고도 하며 하나님의 나라의 기업과 또 우리가 모두 소망하는 휴거와 또 이 땅에 펼쳐질 천년왕국에 대한 말씀들에 대하여 거침없이 이의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늘 그런 문제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며 또 그에 대하여 나를 넘어뜨릴 틈만 엿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내가 하나님의 말씀의 경륜에 도달하지 못하였어도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진리는 그 누가 어떤 말을 하드라도 변치 않는 하나님의 예언인 것입니다. 때가 이르면 아직 그들이 회개치 않은 망령된 말들에 대한 보응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바른 교훈(교리)을 받지 않는 이유의 발단에 대하여 바울은 사람들이 귀가 가려워서 자기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둔다 하였습니다. 귀가 가렵다는 것은 그만큼 조급하여 바른 가르침에 인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2. 많은 스승
우리나라에는 정말 많은 스승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수천개에 이르는 신학교도 부족하여 많은 목사들이 자고나면 신학교를 세우려고 합니다. 또 사람들이 진리의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은 이미 자신들이 스승이 되어 있다고 자부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3장에서 디모데에게 아시아에서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떠난 것을 경계하며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하였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들으며 그 동안 많은 유혹을 물리치고 갈보리채플의 가르침을 선택한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내가 만약 네 욕망의 소욕을 따라 빠른 길을 찾아 나섰다면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권면도 받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3. 허탄한 이야기
두번째로 바울은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하였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는 많은 세미나의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치유목회, 임상목회, 상담목회 최근에는 큐티 목회라는 목사도 있습니다. 무엇을 전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목회를 할까에 초점을 마추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목사들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끌어 내어 재미있는 설교를 만들어 냅니다. 물론 그들은 믿음, 기도, 헌신, 축복 , 성령 충만, 은혜 등에 그 말하고자 하는 초점을 마춥니다. 그리고 그 성경 한구절을 놓고 이것저것을 붙여서 한바탕 울고 불고 하는 흥미진진한 이여기꺼리를 만들어 냅니다. 어느새 교회는 코메디안과 수다장이가 힛트를 치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IV. 의의 면류관
바울은 6절과 7절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여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기 기까왔도다"하였습니다. 여기서 관제의 부음은 죽음의 제사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나의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영광은 나만 위한 것이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의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마지막 유언을 대하며 여러가지 권고와 함께 또 다른 귀중한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끝까지 바울과 함께 진리를 지켜 온 사람의 영광스런 이름과 또 부끄러운 이름들입니다.

우리가 주의 부르심을 받아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헌신하여 이제 곧 우리 앞에 오실 주님으로부터 의의 면류관을 받지 못하고 오늘 바울이 말한 바 부끄러운 사람들과 같이 되어 버린다면 우리의 헌신과 사역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V. 마지막 사역
바울은 9절에서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를 속히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임박한 임종을 앞두고 그 영광된 자리를 자기의 아들과 함께 지키고자 함입니다. 우리가 보모가 임종할 때 그의 아들을 부르듯이 바울은 이제 자기의 마지막 힘의 능력을 그의 사랑하는 자 곧 디모데와 마가와 누가와 또 브리스가와 아굴라 가정과 오네시보로 가정에게 부어주려 하고 있습니다.

  1. 사역자의 격려
바울은 10절에서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다"하였습니다. 바울은 골로세 4장 14절에서 "사랑받는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을 한다"고 전한 바 있으며 빌레몬서에서도 아리스다고와 누가와 함께 나의 동역자라는 칭호로 데마의 사역을 칭찬하였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한  '세상을 사랑하였다'는 것은 목회생활에서 감사와 은혜를 찾지 못하고 세상의 즐거움을 찾아 떠났다는 말입니다. 데마가  사역을 떠나 데살로니가에 가서 무엇을 하였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만 이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 신학교 동기 중에서도 신학을 하면서 많은 고생을 하였고 또 한 때 눈물을 밥먹듯이 하며 필리핀 선교를 나섰던 친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형제는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선교지에 남겨두고 다른 여인을 따라 미국으로 떠나 버렸습니다. 그는 술과 담배와 세상의 낙으로 돌아 가벼렸습니다.

  2. 성경의 보존을 위한 노력
바울은 11절에서 함께 있는 누가를 말하며 마가를 데리고 오라 하였습니다. 흥미롭게도 지금 임종 직전에 부른 누가와 마가와 데모데는 성경의 저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아마 그는 죽음 앞에서 주님의 날까지 하나님의 교회를 이끌어 나갈 진리를 말씀을 수호하고자  결심을 한 것 같습니다.

바울은 12절에서 두기고를 에베소로 보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두기고란 운명의 아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방교회의 헌금을 예루살렘에 보내기 위해 선발된 믿음의 청년으로 바울이 옥에 갇혀 있는 동안 사자로서 일을 하였습니다(엡6:21, 골4ㅣ7, 딛3:13)

바울이 그를 에베소로 보낸 것은 교회의 교도보 에 서있는 에베소에 중요한 서신을 보내려 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바울은 13절에서 드로아 가보의 집에 있는 겉옷과 책 중에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 오라 하였습니다.

드로아는 바울이 메게도냐에 오기 전에 주의 환상을 보았던 에게해 연안의 소아시아 지역입니다. 바울은 매게도냐 사역이 끝났을 때 드로아로가서 일주일을 묶었었습니다(행20:5-12) 아마 그때에 그곳에 두고온 성경자료와 또 서신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전후 기록을 보아 바울은 이제 진리의 말씀을 기록하여 보전할 차세대 목회자들을 불러 주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마지막 사역을 끝내려고 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3, 이단의 경계
바울은 14절에서 구리장색 알랙산더를 경계하여 구나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대로 보응하실 것이라 경계하며  또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고 또 계속 대적할 것이라 말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디모데전서 1장19절에서 후메네오와 함께 바울을 대적하여 바울이 사단에게 내어 준 자였습니다.

바울이 그들을 사단에게 내어 주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일시적으로 주를 믿다가 배반하여 이단을 일으킨 자들일 것입니다.  알렉산더는 어쩌면 에베소에서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바울을 대적하여 소동을 일으켜 그 일행들을 연극장으로 이끌고 갔을 때 유대인들이 그 무리 중에서 유력한 인물 알랙산더를 내세워 선동하려 했었던 인물일 수 있습니다(행19:23-33).

만약 그가 동일인이라면 그는 유대인으로서 구리장색들과 어울려 재물을 모았던 사람으로 그가 후일 일시적으로 바울을 통하여 복음을 따랐으나 결국 후메네오와 함께 믿음에서 떠나 바울을 대적하는 이단의 주동자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4. 구원의 주를 의뢰
바울은 16절에서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는 기록입니다. 이것은 아마 바울이 황제 앞에서 첫번째 복음을 변명했던  첫번째 로마감옥에 갇혔을 때를 언급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나름대로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지지하고 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되자 그들은 모두 자기의 길로 떠나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다시한번 하나님의 말씀이 매이지 않음을 천명한 것입니다.

계속하여 바울은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 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런 신앙고백입니까? 죽음을 목전에 두고 또 배신과 대적자들로부터의 끊임없는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달려가는 믿음의 주권은 그 부르신 자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주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하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하며 필을 놓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더이상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할 수 없는 바울의 애절한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더이상 그들을 돌볼 수 없는 바울은 일생동안 자신의 심령 가운데 역사하신 주께서 그들의 심령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의뢰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의 순간입니까? 나와 함께한 형제들에게도 이와 같은 사랑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