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사도행전강해

(사도행전1:8)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이요나 2006. 9. 1. 13:57

(사도행전1:8)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행1: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얼마 전 우리는 누가복음을 마쳤다.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 가르침을 받은 제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험한 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더욱 자세히 알고 싶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을 만나서 그들의 증언을 토대로 복음서를 기록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누가복음은 우리에게 더욱 친근하며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하겠다.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후속 편으로서 누가복음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사도행전은 복음의 사자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을 초점으로 전개된 복음사역을 기록한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누가복음이 그리스도의 증인들의 역사적 증언이라 할 때 사도행전은 누가 자신이 사도들과 함께 복음의 일선에 동참한 현장 기록이라 하겠다.    

 

사도행전은 누가복음과 같이 데오빌로라는 귀인에게 보내는 서신의 형식으로 기록되었다. 데오빌로라는 이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뜻으로 의사 누가가 섬기던 주인이다. 그는 로마정부의 일원일 것으로 추정되며 안디옥 출신의 주치의 누가를 통하여 예수를 영접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그가 어떤 인물인지 우리는 더 이상 접근할 수 없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 볼 사도행전 1장은 크게 네 문단으로 나누게 된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할 때 문맥을 따라 문단별로 그 핵심을 살피는 것은 성경기자가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정확한 핵심을 발견하는 열쇠이기도 하다. 따라서 1장의 문단별 구성은 다음과 같다.

 

  I.  아버지의 약속에 대한 그리스도의 증거(1-5)

II. 그리스도의 약속과 천사들의 증거(6-11)

III. 제자들의 준비와 기도(12-14)

IV. 사도의 직무와 베드로의 증언(15-26)

 

이와 같이 우리가 성경을 문단별로 그 주제를 구성해 볼 때 별로 특이한 것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강해의 특징은 그 문장 가운데 문맥을 따라 녹아있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발견하는 일이다. 성경은 서술적인 기록 가운데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문단별로 그 주제를 발견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자.

 

I. 아버지의 약속에 대한 그리스도의 증거(1-5)

 사도와 함께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4)

 

사도행전의 서두는 데오빌로라는 수신자의 이름으로 시작된다. 수신자 데오빌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의미로서 의사 누가가 섬기던 주인이다. 그는 로마정부의 일원일 것으로 추정되며 주치의였던 안디옥 출신의 누가를 통하여 예수를 영접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그가 어떤 실존적인 인물인지 우리는 더 이상 접근할 수 없고 다만 누가가 쓴 두 편의 편지를 통하여 누가의 성경여행은 데오빌로에 의하여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누가는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1-2) 기록하였다. 이것은 자신이 앞에서 기록한 서신의 내용을 다시 한번 요약한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우리는 전편의 마지막 부분을 살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누가는 24장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들 중 다른 제자들이 기록하지 않은 특별한 일을 기록하였다. 그것은 엠마오로 내려가면 두 제자의 일로서 극히 개인적인 일이였다. 그러나 이 메시지는 날이 갈수록 공공사역으로 비대해져 가는 현대교회의 모순 속에서 자칫 소외되고 외면당한 자들을 바라보게 하는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또한 누가는 누가복음 24장 끝 부분에서 주께서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 살아 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24:45-48) 하셨다 기록하였다.

 

이 말씀을 분석할 때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 살아 날 것이란 시간적으로 이미 지난 사실이며, 또한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은 이제부터 앞으로의 일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 일들을 기록되었으니라고 현재 과거완료로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한 것은 기록되었으니이 모든 일이다. 이 말씀은 주께서 성경을 정의하신 것으로 여기서 주님은 앞에서 언급하신 모세의 율법, 예언서, 시편만이 아니라 현재까지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일과 그와 관련된 앞으로의 모든 일들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성경임을 제자들에게 확증한 것이라 하겠다.

 

계속하여 주님은 제자들에게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눅24:48,49)하셨다. 이것은 아직 성취되지 않은 구약의 예언으로서 흥미롭게도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으로부터 출발한다. 

 

누가는 3절에서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기록하였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일부러 부인하려 애쓴다.

 

그러나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베드로와 사도들과 그 형제들에게 보이신 것과 갈릴리 사람들 500명에게 일시에 보이셨다고 증거하였으며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행하신 일들을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것이라(요21:25) 하였다.

 

주께서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보이셨다는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성령이 강림한 유월절은 무교절로부터 50일 째되는 날이므로 예수께서 고단 당하여 3일간 무덤에 계신 것을 생각하면 성령강림은 예수께서 승천한지 7일 후의 일임을 추정해 볼 수 있다.

 

4절에는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기록되었다. 여기서 사도와 같이 모이셨다는 것은 식탁을 의미한다.

 

우리는 가끔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에 대하여 신비한 의문에 빠진다. 천사와 같이 영의 몸일지 아니면 우리 육체와 같이 먹고 마실 수 있을는지.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의심하는 도마에게 손을 보이시며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 보라 하시며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다 하셨으며(눅24:39) 또한 문이 닫혀 있는 제자들이 모인 집에 들어 오시기도 하셨다(요20:26) 이것은 부활의 몸의 실체가 어떠함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기록들이다.

 

* 구약성경-요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라 하셨다.  내게 들은 바라는 말씀은 주께 가르침을 받은 것을 말하며 아버지의 약속이라 하셨으므로 구약성경의 예언서가 틀림없다.

 

이것은 후일 성령 강림 후 베드로에 의해서 다시 증거된 구약 성경의 요엘 선지자로 하신 말씀이 틀림없다. 이처럼 성경의 기록은 아버지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로 그리고 사도들로 이어진 일직선 상에서 성취 되어갔다.

 

하나님은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앞으로 있을 세 가지 일들을 예언하셨다. 그 하나는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하셨다 이것은 성령 강림 후 온 세상에 전파될 복음의 역사를 언급하신 것이다. 여기서 예언이란 성경말씀이다. 성경은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 속에서 놀라운 예언의 능력이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두 번째는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행2:18)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 첫 번째와 동시에 나타난 현상으로 이미 우리 안에 성취되고 있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기름부음과 관련된 성경해석의 능력이다.

 

세 번째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행2:19) 이 말씀은 심히 두려운 말씀으로 이제 곧 이 땅에 일어날 마지막 때의 일이다.

 

    *요한의 세례와 성령의 세례

누가는 5절에서 예수께서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다 기록하였다. 이 말씀은 이미 복음서에서 세례 요한을 통해서 여러 번 들었던 말씀이다. 그러면 주님은 왜 이 말씀을 새삼스럽게 다시 하신 것일까?

 

이것은 세례 요한의 세례와 성령에 세례와의 차별성과 동일성을 언급하기 위한 것이다. 요한의 세례는 세례 요한을 통해서 나타난 권세로서 그 매개체가 물이며 그 능력은 회개의 역사이다. 그러나 성령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로서 그 매개체는 성령이며 그 능력은 복음사역이다. 따라서 요한의 세례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날 현상이며 성령세례는 너희 곧 제자들에게 임할 성령세례인 것이다. 그러나 세례의 체험적 역사는 물에 잠기는 것이냐 성령에 잠기느냐가 다를 뿐일 것이다. 

 

II.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6-11)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자세히 하늘을 처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라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11)

 

A.     제자의 질문- 이스라엘의 회복

두번째 문단 서두에는 흥미로운 질문으로 시작된다. 아버지의 약속에 관한 주의 말씀을 듣던 제자들이 예수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이니까 하였다. 이 말씀으로 제자들은 예수께서 메시아 이심과 그가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것임을 확실히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민족적 소망이었고 그리스도의 사도된 꿈이기도 했다.

 

그러나 주님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가 아니요 하셨다. 참으로 야박한 말씀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그리스도의 권세에 의심을 갖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여기서 그 권한이 아버지께 있다는 것은 이 모든 예정과 그 권세가 하나님께 있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목적이 이끄는 삶이란 책으로 전세계를 떠들썩 하게 한 어느 목사는 이 대목을 들어서 오늘날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예언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주께서 이미 그 날은 아들도 모르고 천사들도 모른다 하셨고 부활 후 다시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가 아니다 하셨기 때문이라 말한다.

 

또 그는 여기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핵심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으므로 우리의 사명은 세계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전도라고 외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아전인수격인 해석이다. 주님은 마지막 날의 때가 아버지께 속한 것을 말씀하신 것이지 마지막 날을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 하신 것은 아니다. 신약 성경의 전반적인 주제는 그의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날에 이르기 위해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할 것을 요구하며 그에 대한 확실한 결과가 어떠할 것을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믿는 우리에게 부활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될 것이라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은 성령세례의 목적을 말씀하신 것이지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다. 

 

B.     주님의 답변

주께서 말씀하신 바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은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중심으로 지역적 거리와 한계를 두고 있다. 이것은 성령세례는 하늘로부터 오는 신적 역사라 해도 그 능력의 나타남은 이 땅에서의 질서가 있음을 언급한 것이다. 다시 말하여 복음의 질서를 언급한 것으로 이것은 하나님의 예정과 뜻에 속한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들어 우리가 속히 미전도 국가에 복음을 전하면 주의 나라가 임할 것이다 생각하여 선교사 파송을 서두른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날을 우리 힘으로 앞당길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권세도 예정도 아닐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제자가 스승보다 클 수 없고 열심히 하면 그 스승과 같이 될 수 있다 하셨다. 이와 같이 성령의 권능의 역사도 사도들을 통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땅끝까지 전파되는 것이다.

 

C.     천사의 증언

여기서 우리는 흥미로운 말씀을 보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의 천사들의 증언이다. 제자들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오르시는 주님을 자세히 보고 있을 때에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의 천사가 나타나 어찌하여 자세히 하늘을 처다보느냐 너희 가운데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완성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복음의 최종 목적은 그리스도의 오심이다. 주깨서 언제 오실지 그것은 하나님의 예정과 그의 권세에 있지만 성령의 권능을 받아 그 예정된 질서를 따라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그 목적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있는 것이다.

 

III. 기도하는 제자들(12-14)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14)

 

세번째 문단은 주께서 승천하신 후 그 제자들의 행적에 대하여 기록되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다. 감람원은 주께서 고난받기전 기도하던 겟세마네 동산이 있으며 그곳에서 붙잡혀가신 곳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처형으로 하여 제자들에게 있어 예루살렘은 두려운 곳이기도 했지만 제자들은 주의 말씀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그곳에 저희가 유하는 다락이 있다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어쩌면 마가의 어머니의 집일 수도 있다. 그곳에는 먼저 열한 사도들이 거하였고 갈릴리로부터 예수를 모시던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와 예수의 아우들이 함께 하고 있었다. 예수의 아우들은 예수님 생전에 비아냥 거리던 사람들로 후일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누가는 이들이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기록하였다. 지금 이들에게 있어 할 일은 기도밖에 무엇이 남았으랴. 자칫하면 예수의 무리로 몰려 관원들에게 잡혀갈 위협에 놓인 이들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이 임하기를 믿고 기도할 뿐이다.

 

IV. 베드로의 증언과 사도의 직무(15-26)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16)

 

누가는 15절에서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 가운데서 일어서서 말하되라고 기록하였다. 여기서 한 일백 이십 명이란 기록으로 보아 정확한 수를 말한 것이 아니라 어림잡은 수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열둘의 의미는 매우 신비스럽다. 하늘의 십이궁성, 밤낮의 열두 시간, 이스라엘의 열두지파, 그리고 열두사도 모두가 어떤 예정적 암시가 포함된 것 같다. 더욱이 이스라엘 백성들에 있어 열둘의 의미는 커다란 하나님의 섭리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열둘이라는 숫자에 커다란 의미를 갖는 것은 열성성도들일 뿐이 것이다.

 

이 때 갑자기 사도 중의 거목 베드로가 일어나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16) 말하여 열두 사도 중 직무를 버리고 자기 길로 간 가룟 유다의 이름을 거론하기 시작한 것이다.

 

베드로는 가룟유다를 가리켜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예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증거하며 그에 대하여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 하여 베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방언에 그 밭을 가리켜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주석을 하였다.

 

그는 계속하여 시편말씀을 인용하여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으니 이 말씀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였다. 결국 그의 말을 따라 회중들은 바사바라 하는 요셉과 맛디아를 추천하여 제비로 맛디아를 뽑아 사도의 수에 들어 가게 하였다.

 

이 내용은 오늘날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매우 어려운 부분에 속한 기록이다. 베드로가 행한 일이 주께서 행하신 일인지 아니면 배드로가 스스로 행한 일인지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사도로 가입한 맛디아가 그 후에 무엇을 행하였는지 성경은 그의 행적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베드로의 주장을 따르며 결국 사도는 열둘이라는 숫자에 국한되어야 하며 세례요한의 때로부터 함께 한 자로 예수의 부활승천의 증인이어야 한다. 그러나 후일 유대교도의 잔혹자 바울은 예수님에 의하여 사도가 되었고 또 바나바도 사도라 칭함을 받았다.

 

나는 이 사건은 성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도의 수장격이란 우월감에서 성경의 말씀을 임으로 들어 그 성경말씀에 어떤 원리를 적용하려던 베드로의 실책이라 생각한다. 사도란 주께서 친히 세우신 자로 마가는 주께서 자기의 원하는 자들 중 열둘을 세워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전도도 하며 귀신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라(막3:13,14)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사도는 주께서만 하실 수 있는 그의 권한으로 그의 사도라도 임으로 세울 수 없는 직분임을 알 수 있다.

 

만약 맛디아가 주께서 예정하신 사도라면 오해 주께서 바울을 다시 세우셨으며 성령으로 바나바를 사도의 반열에 두셨을까 싶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것은 베드로가 이러한 주장을 한 것은 성령세례가 아직 임하지 않았을 때라는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라 하셨다. 그것은 다름아닌 성령세례이다. 바울은 성령세례에 대하여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고치는 은사와 서로돕는 것과 다스리를 것과 각종 방언이라(고전12:28) 증거하였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아버지의 약속과도 일치한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주장과 그의 주장을 따라 제비로 사도를 뽑은 것은 성령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아직 성령이 강림하기 전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오늘날 교회 가운데 많은 일들이 성령과 관계없이 교회 지도자들의 생각에 의해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여 행하여지고 있다. 나는 그들이 어떤 부분적인 성경의 말씀을 들어 사용했다 해도 이런 일들이 모두 성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성령의 능력의 나타나심은 그의 택하심 가운데 말씀을 따라 스스로 역사하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주께서 말씀하신 아버지의 약속이 성취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성령의 세례와 그 능력은 주 하나님의 예정을 따라 그의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에 이르러 역사할 것이다.

 

주님 이제 이곳에 임하소서. 이제 우리가 기도하오니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 주시옵소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겠나이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