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15장-5)인간은 쉬운 것을 어렵게 배우려한다

이요나 2007. 2. 21. 10:25

(창세기15장-5)인간은 쉬운 것을 어렵게 배우려한다

 

하늘의 별을 따다가 당신의 뜨락에 쌓아 두신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일가 친척과 친구들을 떠나 홀홀 단신 마누라 손을 붙잡고 정든 고향을 떠나 구만리 타국 땅에 둥지를 틀고 산지 어언간 10여 년이 지난 지금 밤이면 먼 하늘 밑으로 떠올리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과 600여 년의 세월을 살아 온 셈 할아버지의 가슴에 담긴 하나님의 이야기를 귀에 담으며 하늘의 별을 따다 가슴에 묻고 있던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네가 저 뭇 별을 셀 수 있을 진 대 네 후손이 그와 같으리라고 하셨을 때 아브람은 믿었다.

 

 인간은 꿈과 소설같은 이야기는 의심없이 잘 믿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옛날 할머니의 무릎에서 듣던 거짓말같은 이야기들이나 공상 괴기영화 속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역사 속에 기록된 엄청난 사실들을 믿으라면 그것은 사실적 증거를 찾는다. 그러나 수 억 만리 별들에 숨겨진 비밀들이라면 차라리 인간으로서는 감당치 못할 일들이니까 그냥 믿고 싶어진다.

 

하늘에 쌓인 그 신비의 비밀들을 따다가 나의 뜨락에 쌓아 준다고 할 때에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그 신비의 세계가 나의 이상을 흥분시켜 차라리 그것을 받아들이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성술을 믿는다. 별 속에 감추어진 나의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만 같은 심리는 예나 오늘이나 똑같다. 그러나 당신을 남산 꼭대기로 이끌고 가서 네 눈에 보이는 서울 땅 전체를 아직 낳지도 않은 후손들에게 준다면 당신은 그에게 뭐라고 대답을 하겠는가? 당신이나 나의 대답은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내가 그것을 어떻게 믿겠습니까"가 될 것이다.

 

증거를 달라고 하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15:9)

 

자기 후손 속에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태어나 인간의 한계로 도저히 셀 수조차 없는 하늘의 별들과 같은 자손을 둘 것이라는 그 사실에 대하여는 아브람이 익히 경험을 통하여 체험한 하나님의 능력이니까 믿을 수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그의 믿음을 보고 의롭다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이 땅을 소유로 하는 일들에 대하여는 그것이 자신의 삶의 능력과 관계되는 일이기 때문에 믿을 수 없어지는 것이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십여 년 간 살아오는 동안 그가 겪어야 했던 풍진들을 생각할 때 지금 그만큼 넉넉하게 산 것도 자기의 능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일진대 수천 년동안 이 땅을 지배하며 살던 가나안 사람들의 땅을 빼앗아서 너에게 주겠다고 할 때 그 일만큼은 간단하게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아직 서울 갈보리채플 후계자 하나도 길러내지 못한 나에게 한국에 있는 모든 교파의 교회를 빼앗아서 너의 갈보리채플 사람들이 지배한다는 말과 같을진대 어찌 쉽게 아멘이 나오겠는가? 나 같아도 그것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하고 그에 대한 증거를 요구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나를 위하여 삼 년된 암소와 삼 년된 암염소와 삼 년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하라"고 명령하셨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짐승들을 잡아다가 그 중간을 쪼개었다. 이것은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서 살면서 이웃 부족들과 평화의 조약을 맺으면서 행하여 왔던 언약으로서 어떠한 사람들이 언약을 할 때에는 짐승을 잡아 둘로 쪼개고 그 사이를 걸어가면 그 약속은 아무도 깰 수 없는 불문율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예레미야 선지자도 "송아지를 둘로 쪼개고 그 둘 사이로 지나서 내 앞에 언약을 세우고 그 말을 실행치 아니하여 내 언약을 범한 너희를"(렘 34:18)이라고 기록하였다.

 

*피비린내 나는 경험이 필요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15:10-12)

 

이때의 아브라함의 심정을 생각해 보자. 삼 년된 암소와 삼 년된 암염소, 삼 년된 수양을 잡아서 가운데를 쪼개 놓고 그 가운데를 지나는 아브라함의 심정을 생각해 보라. 짐승들의 울음소리와 가죽을 벗기고 짐승의 내장을 다 쏟아 버리고 가운데를 쪼개는 동안 어떠한 심정이었겠는가? 온 몸은 피투성이가 되고 짐승들의 내장에서 터져 나오는 오물들의 냄새와 피비린내 나는 상황에 휩싸인 아브라함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세 마리의 짐승들을 쪼개 놓고 주먹만한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는 차라리 쪼갤 힘조차 없어서 옆에다 치워 두는 아브라함의 심정을 당신은 이해가 되는가? 아마 나 같아도 그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는 내동댕이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아주 깊은 하나님의 가르침이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사람은 사람이 감당하지 못할 분에 넘치는 것을 말했을 때 차라리 그것을 믿게 된다. 그러나 아주 더 쉬운 일들을 하라고 하면 그것은 망설이고 소홀히 여기게 되는 것이다.

 

본문에서 말씀하신 일이 성취되던 날 즉 400년 후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선두가 되어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의 일이다, 그들이 요단강을 건너서 처음 한 일은 할례였다. 그리고 그들이 첫 번째 만난 문제는 감당할 수 없는 가나안 사람들의 성 여리고를 넘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시키는 방법을 따라서 여리고 성을 일곱 바퀴 돌고 함성을 질러서 한번에 무너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 다음에 만난 손바닥만한 아이 성을 지날 때는 3천 명의 장정이 칼날을 들고 올라가서도 패하고 말았다. 차라리 큰 일을 시키면 대범히 그 일을 하나님이 하실 것을 믿고 따르게 되지만 작은 일은 얕잡아보고 자기가 감당하려다가 큰 코를 당하고 만다. 이것이 인간의 심리이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러한 것에 대한 인간의 심리를 지적하는 것이다. 즉 세상일의 대소사가 모두 하나님의 장 중에 있음을 알리신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모두 같은 것이다. 온 세상을 둘러싼 하늘의 수억 만개의 별들을 따다가 내 좁은 뜨락에 놓으실 수도 있다면 한국 땅에 있는 모든 교회를 갈보리채플로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하늘의 일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니까 하나님께서 가능하신 일이고 이 땅의 일들은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니까 아멘이 쉽게 안되는 것이다.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는 조직

인간은 간단한 일을 아주 어렵게 배우기를 좋아한다. 강해설교학교를 6년간 이끌어 오면서 매년 느끼는 것은 성경을 어려운 신학적 용어와 원어를 분석해서 가르칠 때에는 그 내용을 깨닫든 못 깨닫든 굉장히 큰 관심을 갖고 듣는데 아주 쉬운 방법으로 절절히 풀어서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고자하면 코방귀를 뀐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 생활을 조금 오래했다고 하는 사람들이나 사역자들일수록 더한데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초신자들은 눈을 반짝이며 귀담아 듣는다. 예수께서는 복음서에서 천국비밀을 선포하시면서 "너희가 무엇을 들을 것인가 삼가 주의하라"하셨고 또 "너희가 어떻게 들을 것인가 삼가 주의하라"하셨다.

 

하나님께는 큰일이나 작은 일이나 동일한 것이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일을 능히 하셨다면 손톱의 가시를 뽑는 일은 누워서 떡 먹기 아닌가? 그러나 인간과 인간의 언약 사이에는 무엇이 등장하게 될까? 본문에서 아브람은 제물 사이로 날아드는 솔개를 쫓느라 기진하였다.

우리는 창세기 14장에서 왕들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의 원인이 언약에 대한 배반이었음을 배웠다. 과연 인간의 약속은 믿을만 한 것인가? 그러나 인간의 약속은 힘의 균형을 잃을 때 한쪽의 욕심에 의하여 파기되고 만다.

 

요즘 자민련과 국민회의 사이에 아주 불편한 심기가 감도는 것도 이러한 현상이다. 성경의 말씀을 통한 나의 견해로는 절대로 화합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니엘서 2장을 보면 느브갓네살 왕이 꾼 꿈속에 이 땅의 나라들의 마지막 단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발가락이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인즉 그 나라가 얼마는 든든하고 얼마는 부서질 것이며 왕께서 철과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들이 다른 인종들과 섞일 것이나 피차에 합하지 아니함이 철과 흙이 합하지 않음과 같다"라고 기록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은 세기말에 일어날 사회와 국가의 조직상의 현상인데 회사가 연합하여 하나로 되고 정당들이 하나로 화합을 하고 사상이 하나로 뭉쳐진다 해도 그 뿌리는 절대로 화합치 못하여 여전히 파벌과 분열의 다툼이 계속되는 것이다.

 

결국 이 세상이 다 지나가고 오직 하나님이 세우시는 나라 즉 그리스도의 나라가 올 때 망함도 없고 영원하여 그 국권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을 것이다.(단 2:42-44) 이와 같이 인간사의 언약에는 늘 솔개가 날고 있는 것이다. 피의 언약에는 솔개가 날게 마련이기 때문에 그 솔개들로부터 그 언약의 제물을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주께서도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있느니라고 하셨다.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 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15:13-16)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연약한 믿음의 이중성을 경험케 하신 후 향후 400년 이후에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결국 하나님의 택한 백성 즉 아브라함의 민족은 이러한 인간의 속성과 하나님의 영원성을 배우기 위하여 400년간 이방 나라의 종이 되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체험하게 되는데 이러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여 다시 이 땅에 돌아올 것을 언약하셨다. 출애굽기를 보면 430년 만에 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기록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성경의 이해를 구하는 문제이다.

 

여기서 4대 즉 4백년의 기간은 대적에게 고통을 받은 세월을 말하는 것이고 출애굽기에서의 430년은 요셉이 애굽의 통치자가 되어 평안한 생활을 했던 30년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사대 손인 모세의 손에 이끌리어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해방되어 아브라함에게 주신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된다.

 

본문에는 특이할 만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로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이 있다. 그것은 이들의 패역함이 극도에 달할 것을 얘기하고 있다. 시작이 잘못되면 그 끝은 말할 것도 없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이 되기 때문이다.

 

죄는 문둥병과 같아서 감각을 잃어버리고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빠져 들어가서 결국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인내의 한계를 벗어나 결국 멸망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는 것은 인간은 언약을 감당할 수 없어 그 언약을 파기한 일로 두려움과 절망에 빠질지라도 하나님은 언약을 변함없이 지키신다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