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 15장-4)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이요나 2007. 2. 21. 10:28

(창세기 15장-4)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15:4-7)

 

내가 서울에 산지 벌써 40년이다. 지금은 시골과 도회지의 감각을 잃어가고 있는 세태이지만 내 어린 기억속에 거닐던 고향 김포 장능산 기슭에는 밤이면 초롱초롱한 별들이 속삭이고 있었다. 윗마을에서 아랫마을까지 내려가려면 족히 20분은 걸어야 하는 거리인데도 그믐밤 달이 안 뜨는 밤이라도 마을에 다니는 어머니 치맛자락에 붙어다니던 나의 발끝이 돌 뿌리에 걷어채인 일은 한번도 없었다.

 

잘난 아들 벼슬시키겠다고 봇짐 뼛골 팔아 서울 길 보낸 내 어머니! 행여 별에 걸린 어머니 얼굴이라도 볼까하여 남산 꼭대기에 창을 걸어 놓은지 수십 년…아직 보이는 건 남산타워의 희미한 불빛뿐이다. 이제 내 생전에 별이 총총한 여름밤 모깃불 피워 놓고 감자 고구마 옥수수 뜯으며 오손도손 옛날 이야기를 퍼담는 일은 없을 모양이다.

 

바벨탑 이후 지금까지 하늘의 별은 인간의 비밀을 엮어놓은 12천궁이었다. 희랍의 모든 신화가 하늘에서 별을 따다가 엮어서 만들었다. 영화배우 출신인 미국 레이건 대통령의 부인이 국정에서 외출 일정까지 점성술가의 자문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의 주장처럼 하늘의 별들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한 메시지가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다윗도 노래하기를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를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시 19장)라고 읊조렸다.

 

*아브라함이 무엇을 믿었길래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15:6)

 

성경의 기록에도 동방박사들이 별들의 메시지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경배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가 천지 만물 속에 담겨 있음을 실증하는 것이다. 바울도 로마서에서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다"(롬 1:20)라고 기록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적인 존재 즉 신성이 우리가 사는 모든 환경속에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지식과 그에 대한 사랑이 깊어질 때 우리는 그의 임재를 볼 수 있게 된다. 물론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있을 때 말이다.

 

지금 아브람은 현실속에 열려진 이상의 공간 속에서 수천 년 후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깨달아 오고 있다."하늘을 우러러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신 말씀은 그 후 수천 년 후에 오실 메시아에 관한 계시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네 자손"이란 단어가 복수가 아니라 단수라는 점이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이 약속들은 아브람과 그 자손들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였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고 해석하였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이를 믿으니 이를 그의 공의로 여기셨다"(롬 4:3)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에 무턱대고 아멘 한 것이 아니라 그 의미 즉 하늘의 별들을 가르치며 네 "후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셨을 때 하나님이 계시한 "후손"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그렇게 될 것을 믿은 것이었다.

 

현실로 돌아오면 똥인지 된장인지 조차 가리지 못하고 쩔쩔매는 부족한 인생을 산 아브람이 어떻게 수십 세기를 뛰어 넘어 일어날 일들에 대한 지식을 순간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인지. 이러한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실패의 삶을 사는 우리에게 용기를 준다.

 

*부르심과 말씀의 순종

여기서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하나님의 존재하심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도 아니다. 오직 단 한 사람, 이 세상에 오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하심을 믿는 믿음이었다, 또한 아브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은 것은 그가 전쟁에서 이기고 십일조를 꼬박 꼬박 잘 바쳐서 된 것이 아니다. 또 이방 가운데서 정말 선한 일을 많이 해서 된 것도 아니며 가족과 이웃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고 전도를 잘해서 얻은 것도 물론 아니다.

 

그는 언제 이루어질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가 오셔서 인간의 숙제를 해결하시고 그를 믿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구원하셔서 영원한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룩하신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 때까지는 아직 하나님의 율법도 주시지 않았었고 오직 천지 만물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체험해야 하는 시대였다. 그러한 상황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깨달아 자신의 육신의 한계를 벗어나 그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 후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면 그 역시 우리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이러한 최상의 믿음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것은 창세 전에 우리를 부르신 그의 택하심과 그의 말씀을 신뢰하며 따르는 순종에서 비롯되는데 그의 전지하심과 전능하심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있을 때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그의 영광을 위하여 부르신 것인데 그는 처음부터 우리의 능력과 지식같은 것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고 요구하지도 않으신다. 다만 그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순종과 그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신뢰와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그러한 살아있는 믿음 생활 속에서 우리의 모든 환경속에 설정한 하나님의 오묘하신 능력과 신성으로 우리를 완성해 나가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좀더 깊은 사고를 가지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으며 풍만한 그리스도의 지식에 이르도록 정진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의지가 최고에 이를 때, 우리 안에 겨자씨만한 믿음이 생겨나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들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 땅을 준다면 믿겠는가?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15:7-8)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부모 형제를 모두 떠나게 하여 타국 땅에서 외로운 투쟁의 삶을 살게 한 아브람에게 그를 부르신 목적을 설명하고 계시다. 사실 그 땅은 가나안의 일곱 족속들이 살고있던 기름지고 아름다운 최고의 땅이었다, 이 말은 완전히 굴러 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이야기다.

 

내가 7년 전 갈보리채플의 한 사역자가 되어 오직 그의 부르심만을 믿고 의기양양하게 한국으로 돌아와 선교의 대국이라 불리우는 한국에 뿌리를 내리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만 아직 나는 내 땅 한 조각을 얻지 못한 채 요모양 요꼴인데 만약 지금 하나님께서 나를 남산보다 더 높은 산으로 이끌고 가서 이 땅을 지배하고 있는 사람들의 손에서 빼앗아 내게 준다면 난 과연 무슨 말을 하게 될까? 이것에 대한 나의 대답은 아브라함에게 들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