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7장-2) 방주에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이요나 2007. 2. 21. 13:47

(창세기7장-2) 방주에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창세기7:11-16)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곧 그 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 셈, 함, 야벳과 노아의 아내와 세 며느리가 다 방주에 들어갔고 그들과 모든 들짐승이 그 종류대로 모든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모든 새가 그 종류대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에 들어갔으니 들어간 것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너는 무엇을 추구하는가?"

우리 민족은 언젠가부터 "밤새 안녕하십니까"라는 인사가 일상의 생활용어가 되어 왔다. 하나님의 택한 민족 유대인의 인사는 살롬 즉 평안이다. 또한 제자들을 떠나시며 하신 주님의 말씀도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끼치노라"였으며 부활의 아침 제자들에게 오셔서 처음하신 말씀도 "평안하뇨?"였다.

 

이처럼 인간사에서 평안이란 말이 중대 관심사가 되어 온 것은 무슨 이유일까? 통계에 의하면 이 땅에는 1년의 평화와 13년 간의 전쟁의 비율이라고 한다. 결국 이 통계는 이 땅에는 평화가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결국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영원한 평안이다. 그러나 지금 이 땅에서 평안을 누리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홍수 이후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정결한 제사를 받으신 후 죄의 굴레에서 어쩔 수 없는 인간에게 내리신 새로운 법칙 즉, "이 땅이 있는 동안 있을 쉬지 않는 심음과 거둠, 추위와 더위, 밤과 낮".의 설정이다. 이것은 환경을 따라 바뀔 수밖에 없는 한계 속의 인간으로 하여금 그 마음을 오직 주께 두어야 함을 가르치신 하나님의 지혜이다.

 

"평안의 토대를 아는가?"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인간은 왜 평안함을 추구하며 그 추구하는 "평안"은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평안에 대한 정의는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겠으나 결국 평안이 추구하는 것은 바로 "자유"다.

 

그렇다면 평안의 모태를 이루는 자유는 과연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일까?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자유를 깨닫지 못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가르치셨다.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이해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문맥을 따라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성경을 보면 예수께서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다. 이 말씀의 핵심은 "진리"이고 그 진리를 알 때 성취되는 것은 "자유"이다. 그리고 이 "진리"를 알기 위하여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정의이다.

 

"믿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는 현재의 자유로부터 구속당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즉 담배를 끊어야한다. 술을 마시지 말아야 한다. 남과 다투어서도 안 된다. 욕을 하여서도 질투도 시기도 용납되지 않는다. 또한 교회를 나가야 하고 성경을 보아야 하고 기도해야하고 또 자기가 애써 번 돈의 십분의 일을 헌금하여야 한다.

 

이들에게 이러한 주장은 모두 숨막히는 일들이다. 사실 위에서 거론된 사항만을 생각해 볼 때 이것들은 인간의 모든 자유를 막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굴레 속에서 생활을 하면서도 조금도 자유를 유린당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미 자유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죄의 굴레를 아는가?"

사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라는 굴레에 잡혀져 있었다. 이 속성은 우리가 컴퓨터 속에 내장되어 있는 시스템과도 같아서 정해진 값을 변경하지 안는 한 그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이와같이 인간도 하나님의 정하신 값을 갖고 태어났다. 그 정해진 값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었다. 다만 흙이라는 원소를 가지고 그 육체의 한계를 정하셨을 뿐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아담은 생령이었다. 이 생령이란 히브리어는 "네페쉬"로서 생명과 호홉하다의 복합명사로서 "살아있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또한 성경은 성령으로 난 사람에 대하여 "바람이 임의로 불매 사람이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요3:8)라고 기록하였다. 이와 같이 사람은 창조시로부터 하나님의 영원하심 속에서 평안과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자유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신 진리를 따라 무한의 부분과 유한의 부분으로 나누어졌는데 즉 시간과 공간 그리고 빛과 어둠의 영원의 범주와 물체 즉 유한의 범주 체제인 육체 안에 설정된 것이다.

 

"누가 나를 아는가?"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대 환난을 통과할 노아의 방주는 하나님의 규격에 의하여 지어졌다. 성경은 "노아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 하였다"(창6:22)고 기록하고 있다.

이 규격은 완전한 지혜와 지식과 그의 계획하심 속에서만 창출될 수 있다. 아마 120년 동안 노아가 짓는 방주를 보는 세상사람들에게는 인간이 어떻게 저 속에 다 들어가서 살 수 있겠는가를 생각했을 것이다.

 

노아가 만들고 있는 생전처음 보지도 듣지도 못한 괴물단지를 타고 하나님께서 손수 지으신 아름답고 풍요로운 땅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미지의 세계로 가야한다는 노아의 말이 이해도 안되고 합리적이지도 못하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사는 동안은 물론 아담의 창조로부터 이 땅에는 비가 없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전능자의 지혜를 알 수도 이해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무엇이 너를 자유케 할 것인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여 "자유"에 이를 수 있을 것인가? 앞에서 우리가 살펴 본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요7:31)라고 하신 말씀의 초점은 그들이 자신을 믿은 것에 만족하지 말고 말씀 속에 사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원리를 설명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결국 진리를 알기 위하여는 그의 말씀 속에 거하여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주께서는 인류의 영원한 안식을 마련하기 위해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시던 전날 밤 세상에 남아 있을 제자들을 위하여 "저희로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라고 기도하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평안 즉 그의 자유로 들어가는 길은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 뿐인 것을 증명한다. 오늘날 우리가 믿는 그의 말씀 즉 성도의 매뉴얼 성경은"~을 하지 말라"로 빽빽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진리의 말씀은 우리를 자유의 세계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유일한 방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