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 6장-6) 환난을 통과하는 방주의 의미

이요나 2007. 2. 21. 13:53

(창세기 6장-6) 환난을 통과하는 방주의 의미

 

(창세기6:13-22)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가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거기서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혈육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너는 먹을 양식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먹을 것이 되리라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방주가 주는 의미"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일들을 행하실 때 택하신 자기의 종들에게 말씀으로 알리셨다. 최근에도 이 말씀을 들어서 자기에게 직접 앞날에 있을 일들을 말씀하신다는 직통 계시자들이 있는데 이것은 개인 또는 개교회에 해당되는 일이라면 몰라도 교회사에 미치는 영향이라면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하늘나라에 대한 일 즉 그의 교회와 성도에 관한 모든 일들은 이미 성경에 완성되어 있고 이제 그 말씀의 성취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앞으로 하실 일들을 노아에게 알리신 후 앞으로 있을 홍수 즉 이 세상이 겪어야할 대 환난을 통과할 방주를 짓도록 명령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대홍수를 건넌 방주를 가리켜 앞으로 올 대환난을 통과할 교회의 모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좀더 성경을 면밀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방주" 즉 "테바"라는 히브리어는 "상자"를 의미하는데 성경에서 이 단어는 모세를 담아서 나일강에 띄웠던 그 상자에서만 쓰였다. 결국 이것은 세상의 환난을 통과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뜻한다. 노아는 타락한 세상에서 신세계로 출발하는 하나님의 사람이고 모세는 이방세계에서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이 두 사건의 공통 주제는 세상에 임한 환난으로부터의 구원이다.

 

"세상을 통과하는 두 교회"

그러면 이 두 사건들은 세상의 환난을 통과할 교회의 모델인가? 나는 개인적으로 이 말도 틀리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성경에 기록된 세상에서의 일들이 양면성과 이중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노아의 방주나 모세의 상자나 모두 이 세상의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교회라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이것이 교회가 겪어야 할 대환난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이것은 성경기록을 문맥을 따라 단어가 주는 깊은 의미들을 생각해 볼 때 명확해 진다. 본문에서 "역청"(kaphar/코페르)이라는 단어는 후에 "속죄"(atonement)라는 말로 쓰이게 되는데 "죄를 위한 어린 양의 피의 속제물"을 의미하는 역청이 방주 안팎에 칠하여졌다.

 

이것은 애굽에서 탈출 전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유월절 의식 속의 어린 양의 피로 히브리사람들 집 문 설주를 바른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이 두 사건은 이 세상의 죄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으로 세상의 죄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교회를 지칭함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을 좀더 면밀히 살펴 볼 때 노아의 방주 한참 후의 모세의 상자는 세상의 죄악 속에서 은혜로 택하신 의인의 가족들(신약의 교회)을 구원한 후에 생기는 히브리인(이스라엘 민족)의 사건으로 애굽의 바로(세상임금)에게 사로잡혀 고통받는 택한 백성을 돌아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따라서 모세의 사건을 교회사적으로 생각할 때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시고 전인 구원하시는 로마서 11장의 말씀과 계시록의 7장의 144000명의 이스라엘 속에서 인친 자들과 연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들림 받는 교회의 모델"

우리는 노아의 홍수 바로 앞에서 아직 풀리지 않은 신비의 사건 하나를 만났었다. 즉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들림을 받은 "에녹의 휴거"이다. 그의 나이 365세 속에서 일년을 하루 같이 주를 섬기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에녹"이라는 그의 이름은 우리로 새로운 "시작"을 가르친다. 에녹의 휴거는 분명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 즉 교회의 휴거를 의미한다.

 

또한 에녹의 휴거 다음에 오는 노아의 홍수는 앞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지칭되는 타락한 천사들에 의하여 지배될 하와의 아들들("산 자의 어미")의 강포 속에서 구속하는 "메시야"를 낳을 여자의 후손("교회"=참조:계12장에서의 여자)에게 임할 은혜를 의미한다.

 

"세상의 환난을 통과할 방주의 규격"

이제 본문에서 방주의 규격에 대하여 살펴보자. 이것은 세상을 통과하여야 할 교회의 질서라고 해도 좋다. 여기서 규빗이란 길이의 단어로 약 45cm이다. 즉 사람의 손가락을 펴서 팔꿈치까지의 길이다.

한 뼘은 "스펜"(span)이라고 한다. 우선 길이가 300규빗이라면 약 135m로서 축구 경기장의 반정도 길일 생각하면 된다. 넓이가 오십 규빗이니까 22.5m, 높이가 30규빗이면 약 13.5m정도이고, 갑판이 3개였으니까 갑판의 각 높이는 약 4.5m이다. 이것을 부피로 따지면 약 40.000입방미터가 된다.

 

이것은 짐승을 실는 화물차 522정도에 해당하는 크기로서 화차 하나에 124마리의 양이 들어간다고 계산할 때 125.000마리의 양을 넣을 수 있다. 또한 한 규빗 즉 45cm마다 빙 불러서 창을 내었으니까 통풍도 충분했을 것이다. 화물차 522개의 용적이라면 오늘 날 생존하고 있는 동물들의 모든 종(種)을 실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아마 이 때 집채만한 공룡들은 넣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공룡들은 자신들이 크니까 누가 자신들을 멸할까하는 자부심으로 나아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재미있는 장면을 생각할 수 있는데 방주에 타기 위하여 줄지어 노아 앞에 나와 있는 짐승들을 생각해 보라!

 

이 땅에 짐승들은 물론 새와 기는 것까지 무슨 수로 불러모을 수 있다는 말인가? 아마 이것은 이들을 창조하실 때 이미 그들의 머리 속에 입력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파산할 배에서 쥐들이 모두 내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짐승들의 머리 속에는 앞에 재난을 감지하는 어떠한 지능 장치가 포맷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을 통과하는 우리의 준비"

여기서 우리는 모든 피조물을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피조물들을 본다. 예수님도 바람을 명령하시어 파도를 잠 재우셨고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어 뿌리째 마르게 하셨다.

 

또 제자들에게도 "너희가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으면 이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우리라"고 하셨다. 이처럼 피조물들이 그의 명령을 따르는 것은 그가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말을 듣지 않는 피조물이 있다면 자기의 위치를 떠난 타락한 천사와 그를 따르는 죄인들의 마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