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1장-3)"PRESENCE"와 "PRIME MOVER"

이요나 2007. 2. 21. 15:40

(창세기1장-3)"PRESENCE"와 "PRIME MOVER"

                         

(창세기1: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라

 

*정체성 고민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늘 고민한다. 그리고 자신의 세상 가운데에서 존재를 위하여 늘 투쟁한다. 내 존재 가치가 세상 가운데서 인정을 받지 못할 때 우리는 불안해하고 실의에 빠져 결국은 어떠한 힘의 필요성을 찾게된다. 그래서 종교와 철학이 탄생되게 마련이다. 우리의 존재 그리고 나를 포함한 모든 물체의 존재들의 형성과 그리고 그것을 움직이는 힘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우리는 우주의 창조와 함께 이어지는 어떠한 존재들에 대하여 그리고 그 존재를 활성화시키는 운행자에 대하여 살펴봄으로 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해 보도록 하자

 

교회의 탄생이후 가장 큰 문제는 성경 말씀의 알레고리화에 있었다. 일부 선지식들의 발상 속에서 태동된 헬라니즘은 급격한 문화와 지식의 보급 속에서 초자연적인 힘의 태동을 사모하는 사람들 속에서 대중화되고 있었다.

 

신비주의자들은 아직 명확히 검증되지 않은 부분들을 과학의 원리와 문학적 사고를 도입 결국 우주 속에 감추어진 비밀 을 체계화 시키고자 하였는데 이것은 배후에 있는 영적 세력에 의하여 결집된 것이다. 이것이 교회 안에 들어 온 거짓교사들에 의하여 묵인되고 가르쳐 짐으로서 성경의 비유들은 알레고리화 되었다. 이로 하여 하나님의 교회는 해석적 선택를 따라 분열되고 그 선택은 조직의 배경과 힘이 되어 통치 세력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를 따라서 전달되어야 할 극도로 중요한 부분에 대한 하나님의 비밀(계획)에 대하여는 오직 어떠한 비유나 상징언어를 사용하셨는데 이 열쇠는 미리 아심 속에 택정된 기름부음 속에 있다. 이러한 것을 좀더 체계적으로 알기 위하여 우리는 "존재"와 "운행자"에 대하여 연구할 필요가 있다.

 

*성경해석의 틀

창세기 1장1절과 마찬가지로 2절은 창조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매우 귀중한 틀이다. 교회들은 1절과 2절을 가지고 성경해석의 이해관계로 서로 반목 해 왔다. 이처럼 사단은 에덴동산의 아담을 넘어뜨려 에덴에 머무르지 못하게 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해석의 차이점으로 갈라진 사람들의 어느 편에 손을 드느냐가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세밀히 살피고 연구함으로서 성령의 도움으로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말씀의 뜻을 깨닫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의미심장하게도 창세기 1장의 모든 구절들은 1절을 제외하고 모두 접속사 "그리고"(and=히브리어 '와우')로 시작된다. 이러한 문장의 구조는 각 문장이 논리적으로 또한 앞 뒤 구절과 연대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뜻한다.

 

우리가 성경을 귀납법적으로 연구하는데 가장 기초적인 것은 첫째로 기록된 성경말씀의 문법적 이해와 두 번째로 역사적 이해를 이루는데 있다. 또한 온전한 성경 말씀의 이해를 위하여는 성경에 기록된 원어의 문법적 이해가 필요하다.

 

히브리어 성경에 각 구절에 기록된 "그리고"(와우)라는 접속사는 문맥의 구조상 앞의 문장과 뒤의 문장의 종속적 연결로서 두 문장 사이에는 다른 공백의 여지를 허락치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일부 학자들이 단어의 일부를 그 말이 포용하고 있는 가능성 있는 다른 의미를 내포하는 말로 해석함으로서 1절과 2절 사이에 어떠한 공백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신학적 노선을 만들어 놓았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또 하나 주의해야 할 것은 다른 가능성을 모두 배제하는 것과 임의로 다른 가능성을 첨가하는 일이다. 이러할 때 인간은 성경이 금하고 있는 "말씀을 더함"과 "말씀을 제함"의 커다란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우선이 아니다. 성경의 말씀의 가르침이 누구에게로부터 온 것이냐가 먼저이다. 우리는 예수님 시대에도 수많은 성경학자들(랍비들과 서기관)이 있었음을 안다. 그들의 뿌리는 계속 교회사를 타고 들어 왔다.

 

이로 인하여 초대 이방인 교회의 전초지 안디 옥 교회에서는 커다란 문제가 제기 되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행전15장)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천지가 창조됨으로부터 있음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복음의 도를 위하여 예수께서 친히 사도를 세우셨음을 알고 있다. 마가복음 1장 1절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하셨고 바울도 빌립보서 4장 15절에서 "복음의 시초"라고 하였다.

 

이러한 권세는 하나님의 전지하신 속성 속에서 만세 전에 택하심에 의거한다(엡1:4) 사도 베드로는 성경의 해석에 대하여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것이 아니니 예언(성경)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경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1:20,21) 그로부터 우리는 초대교회에서의 쟁점은 복음사역과 일어난 거짓교사들의 가르침에 대한 사도들의 변증과 교회 수호이다.

 

*사단의 역사

우리가 성경에서 배우는 바와 같이 사단의 유혹은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 성경의 말씀의 왜곡시킴으로부터 시작한다. 우리가 창세기 3장을 통하여 매울 목록이지만 사단은 광야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할 때에도 늘 그러했다.

 

이것은 실제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복음사역 현장에서도 나타났는데 이로 하여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하여 그들의 잘못된 성경의 해석과 이해를 바로 잡으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는 전통과 계보의 조직은 자신들이 구축한 아성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귀신의 왕으로 몰고 가는 서기관들을 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람이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한다고 하셨다. 이것이 세상의 법칙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세계는 오직 하나님의 법칙에 의하여 세워진다. 이에 대하여 주께서는 내가 하나님의 손으로 귀신을 쫓는 것이면 너희에게 하늘나라가 임하였느니라 하셨고 다시 누구든지 성령의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한다 하셨다.

 

각설하고 우리는 본 절에서부터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이 처해진 상황과 그 땅이 다음 단계로 발전되어 가는 모습과 그 목적의 과정들을 살펴 볼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이 논쟁을 일으키고 있는 이유 즉 1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땅은 혼돈하고 공허할 수 없다는 전재 하에 이루어낸 공론은 "그리고"라는 접속사를 통하여 계속 이어지는 연속적인 상황은 우리에게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증명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이 온전히 해석할 수는 없다. 고린도전서 2장에도 오직 성령께서 하나님의 모든 것 그 마음까지도 통찰하심으로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미리 아심 속에서 택하신 자 속에서 역사 한다.

 

*존재에 대하여

땅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은 곳에 있음은 그 뒤에 나오는 다음 구절들을 바로 이해함으로 이 이유와 원인을 알 수 있다. 먼저 우리는 2절 뒷부분에서 "하나님의 신"의 운행하심을 만난다.

 

광대하고 무한한 하늘이 나와 지구와 우주를 포괄하여 포용하듯이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서 운행함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신" 이 말 속에서 우리는 지금 우리 믿음 안에서 체험하는 하나님의 성령 바로 그 신(Sprit)이 수면 위에서 운행("라카프"/렘23:9 신32:11)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수면"(face)라는 말은 앞에 서술된 "깊음 위"라는 말과 동의어인데 이 말은 "존재"(presence)로서 이 말의 의미는 무형의 물이 무형의 땅처럼 본래의 응집체가 아닌 하나의 "존재"(a presnce)였음을 증명한다.

 

왜 땅은 혼돈하고 공허한 "존재"였을까? 그것은 아직 하나님의 전지하심 속에서 계획과 예정 가운데 진행하실 다음 단계의 과정 가운데 처한 하나의 "존재"(presence)이며 이 땅의 존재는 하늘과 땅위로 나눌만한 많은 "물"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시는 또 하나의 "존재"속에 처하여 있는 상황을 생각하여야 한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러한 진행과정을 단계별로 기록하고 있을까?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단계별로 연결하여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한계를 가지고 창조되었다. 우리는 육신 속에 거한다. 우리라는 개념은 육과 혼과 영을 통털어 말한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그리고 우리의 영은 육을 초월하여 활동할 수 있지만 우리의 삶은 육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의 지식은 먼저 육적인 감각의 체험을 통하여 터득하게 되는데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를 우리의 한계 속에 단번에 담을 수 있을 것인가? 창조자의 마음과 생각과 계획을 어떻게 피조물 안에 넣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단계별로 알뿐이다. 그의 신의 운행은 지금도 믿는 자 안에서 감동하심(벧후1:21)으로 역사 하시고 계신다.

 

이제 우리는 창조이야기4를 통하여 창조하신 물체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힘이 어떻게 활성화되는 가를 연구해 보도록 할 것이다. 이것은 물질적인 우주의 요소를 동력화 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함께 창세기 1장을 면밀히 살펴 봄으로서 방대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터득하는데 힘쓰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