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데살로니가강해

(살전3:10)온전한 믿음과 거룩한 생활

이요나 2007. 2. 27. 12:25

(살전3:10)온전한 믿음과 거룩한 생활

(살전3:10)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 본 1장과 2장은 2개의 특별한 주제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교회의 모델'에 관한 것이고 또 하나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1장6절에서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하였습니다.

또 2장14절에서는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의 본받은 자 되었으니 저희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을 받았느니라"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본'이란 샘플, 모델로서 완성을 위한 기준을 의미합니다.
 

'본 받는 자'라는
 말은 바울서신 전반에서 언급되고 있는 말로서 바울은 로마서6장에서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하였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는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4:16) 하였습니다.

 '본받는 자'와 '본이 되다'라는 말 사이에는 필수 원리가 설정되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멘토'와 '멘토리'의 관계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여 '본이 된 자'는 자기 앞에 세워진 '본'(모델)을  통해서 '멘토링'을 받은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붕어빵 원리로서 리더를 받지 않은 자는 리더가 될 수 없다는 원리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1장에서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믿는 자들의 본이 된  데살로니가 교회의 모습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고대하는 믿음의 증거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믿는 자들의 본이 된
 것 대하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며'(1:5) 또한 '너희가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 받았기 때문이라'(1:6) 하였습니다.

계속하여 바울은 2장에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이방에서 믿음의 본이 된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특별히 이러한 말을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사회에서 인정 받는 장성한 아들이 되기까지는 그 부모들의 헌신적인 희생과 가르침과 기도가 있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2장에서 그들을 온전히 키우기 위해 유순한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같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모함으로  복음을 전하였고 그들로 거룩하고 옳고 흠 없는 자로 키우기 위해 
아비가 자가 자녀를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듯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일대에 믿음의 본이 된 그들에게 아직 완전치 못하여 흔들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 가운데 또 다른 모델들이 그들 앞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떠난 후 그 지역에 몸의 부활을 부정하며 금욕과 육신의 향락을 쫓는 헬라 철학자들과 유대주의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이 만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화와 그리스도인의 생활
오늘 우리가 살펴볼 3장은 1장과 2장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우리는 오늘 이 말씀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랑하는 자녀들을 악의 세력 가운데 두고 나와야 했던 부모들의 안타까운 현실과 마음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서두에서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 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여겨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군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누구든지 이 환난 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로 이것을 당하게 세우신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1-3)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사도행전 17장를 함께 살펴 보아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는 바울과 함께 한 복음의 동역자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마게도냐의 첫 성 빌립보에 들어와 복음한 내용들이 상세히 기록되었습니다.

마게도냐의 첫 성 빌립보에는 아직 유대인의 회당이 없었는지 빌립보에서 바울의 전도의 훼방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습니다. 따라서 그곳에서의 훼방은 교리적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 문화의 충돌이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방나라의
 각 지역 사람들 속에 역사하는 영적이 문제들은 그들의 생활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나 고린도나 아덴이나 이방의 문화와 경제는 모두 그들이 섬기는 종교와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빌립보에 들어간 바울이 여종의 귀신을
 쫓아 냄으로 빌립보 사람들에게 점으로 유익을 주던 여종이  다시 점을 보지 못하게 되자 그들은 바울과 실라를 잡아 관가로 데리고 가서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로마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행16:20-21)고 고소하였습니다.

결국 바울 일행은 주께서 옥을 여심으로
 풀려 나와 압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처 데살로니가에 이르렀습니다. 바울은 그곳에서도 바로 유대인 회당으로 들어가 3주 동안 성경을 가르쳤는데 그의 
강해를 들은 많은 헬라인들과 귀부인들이 사이에 동요가 일어났습니다.

이에 당황한
  유대인들이 바울을 시기하여 야손의 집에 머물고 있는 바울 일행을 이끌어 내어 읍장 앞에 고소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바울과 실라는 데살로니가 아래지역에 있는 베레아에 들어갔습니다. 바울이 그곳 회당에서도 복음을 전하자 헬라인과 귀부인들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되자 또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충동하여 소동을 일으켜 할 수 없이 데모데와 실라를 남겨두고 바울은 혼자서 아덴으로 내려왔습니다.

 *문화를 지배하던 헬라철학
그당시 아덴은 수도 로마와 함께 대도시 중의 하나로서
  에피쿠르스 학파와 스토이고 학파를 일으킨 헬라철학이 유행하여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아덴에 도착하여 그 지역적 특성을 알아채린 바울은 사람들을 보내어 실라와 데모데를 속히 
아덴으로 오게 하였습니다(행전17:11-15).

아덴에는 아레오바고라는 헬라의 개혁자가 세운 대법원이 있었고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듣고 말하기에 쉼취되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는다"(행17:21)기록하였습니다.

바울은 그 시대의 잘못된 지식들이 아덴을 중심으로 마게도냐 일대로 퍼지고 있음을 간파하고 속히 다시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파송하였습니다.
 디모데는 데살로니가로 가서  야손의 집에 머물며 바울이 염려하는 바를 가르쳤을 것입니다(롬16:21). 

 *복음과 미래의 지식
바울은 4절에서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더니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하였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떠나면서 장로들에게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행20:29-30)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들의 문제는 앞날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너무 둔감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예언과 방언을 일삼아 그 방언과 예언이라는 것이 흡사 점보는 귀신들에 이끌린 것 같은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이고 성경의 가르침은 미래 지향적입니다.

최근 현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보안법과 관련하여 4대법안 개정문제를 둘러싸고 국론이 분열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교계 중진들이 모여 반대시위 집회를 열고 또 최근에는 보수결집을 위한 새로운 모임까지 결성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이 출발한 이래 독재정권 하에서도 우리는 국가체제의 이념적 불안은 느끼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현정권이 들어서면서 진보 개혁이라는 논리 속에 좌파성향의
 국가정책이 대두되자 국론은 진보와 보수로 분열되고 민심이 불안해졌습니다.

 최고 지도자에 따라 국가의 이념과 정책이 변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국가 지도자를 선출할 때 지성을 가진 지도자들은 충분한 사고를 갖고 선거에 임하였어야 할 것이며 또 지난번 대통령 탄핵이 거론되었을 때에 결단을 내려야 했었습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와 관련하여 나는 몇 개의 시국에 관한 칼럼을 올린 바 있었습니다. 그때 많은 목사들의 항의가 빗발쳐 왔습니다. 최근 미국 부시 대통령과 관련된 칼럼을 올렸습니다만 지금도 많은 논쟁의 글들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의 반론을 볼 때마다 도대체 그들의 머리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 것인지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술에 취한 사람들처럼 전후 좌우를 생각하고 양심을 따라 판단하지 않고 무대보로 이런 글 쓴 너 나쁜 놈이야 하는 식으로 나옵니다. 참으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복음은 미래지향적이며 어느 시대이고
 그 말씀은 택하신 그의 종들을 통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지역 문화와 복음생활의 관계
바울은 5절에서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라"기록하였습니다. 제자 디모데를 보낸 것은 이미 바울이 미리 말한 장래에 있을 일들에 관한 그들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일본이나 태국과 같은 지역으로 자녀들을 유학 보낼 때 부모는
  자녀들이 그 지역의 풍토와 문화생활 속에 녹아 있는 종교성 철학에 휘말릴 것을 가장 걱정하게 됩니다. 함께 있을 때 기도하며 또 성경의 가르침을 통하여 많은 지식을 전달하고 굳게 믿음을 지킬 것을 약속하였지만 서로 떨어져 있게 되면 부모는 그 자녀들의 영적 문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자녀가 일본으로 간다면 무엇을 가장 염려하겠습니까? 첫째는 우상숭배요 두 번 째는 음란한 생활입니다. 이와 같이 그 나라와 그 지역에 역사하는 철학과 우상숭배는 그 문화와 생활 속에서 사람들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지난번 미국에 갔었을 때 저는 정말 놀라운 일을 경험했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울 사도가 각 지역 회당에서 겪었던 일들과 같은 내용입니다. 내가 간 곳마다 교회가 있었고 나는 그곳에서 성경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 지역 목사들이 들고 일어나 나를 내어쫓는 것이었습니다. 기 이유는 그 지역의 유지들이 나의 설교에 귀를 기우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근심과 안위
그러나 바울은 돌아 온 디모데의 보고를 듣고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하였습니다.

여러 가지로 걱정하던 자녀들이 부모의 뜻대로 잘 있다는 소식처럼 기쁜 일은 없습니다. 더우기 환난 가운데서 낳은 복음의 자녀들이 세속에 물들지 않고 굳은 믿음에 서서 자신들을 나은 부모를 기억하며 그들의 가르침에 굳게 서 있다 할 때 바울의 기쁨은 더할 나위 없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하였습니다.

자녀의 변치 않은 굳은 믿음을 확인한 부모는 무엇을 할까요? 그것은 감사밖에 없습니다. 자냐가 잘 잘아 준 것만으로도 부모는 감사한 것입니다. 잘 자라 주어서 감사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 기쁨을 보답할 길이 없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보답할꼬"하였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감사의 마음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날이 갈수록 그들의 보고 싶음에 사모치게 됩니다. 고난 때에는 고난으로 근심을 하게 되지만 고난 중에서도 굳건한 믿음에 서 있는 자녀를 볼 때 부모의 마음은 속히 그들 가운데로 달려가기를 힘쓰게 됩니다.

  *부족한 믿음
10절에서 바울은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 하였습니다. 과연 바울이 이들에게 달려가 그들의 부족한 믿음을 온전케 하려 하였던 그 부족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종말에 있을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물론 바울과 디모데는 그들 가운데 머물 때에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강림에 관한 말씀을 가르쳐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지역은
  헬라의 영지주의자들에 의해 전해진 그노시스 철학과 또 유대인의 율법주의가 생활 문화 속에서 자리잡아 가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에게 달려가 얼굴을 마주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에 관한 
온전한 지식을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그 지식을 왜 얼굴을 보고 전해야 한다고 하였을까요? 이것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은
  마지막 날에 있을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에 속한 것입니다. 또한 강림에 대한 지식은 서신으로 전달하기에는 너무 방대한 것이고 이미 그들 가운데 육체의 부활을 부정하는 스토아파의 지식이 만연되어 있어 그들을 설득하고 위로하기 위해서는 얼굴을 대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생활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들과 다시 만날 날을 간구하며 주께 기도하여 "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하였습니다.

이 기도문 속에는 또 다른 암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강림에 이르기 위해 요구되는 거룩한 성도의 삶에 대하여 점점 나태해져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어떤 성도들이
 잘못된 지식에 미혹되었다면 그들은 매일 삶 속에서 잘못된 지식을 듣게 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들과 같은 생활에 빠져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언급된 주의
 다시 오심과 성도의 거룩함은 바울서신의 대주재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 말씀은 종말을 사는 우리의 시대에도 꼭 필요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저는 갈보리채플의 사역자가 되기 전 이십 년 동안을 예수를 믿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 나는 우상에게 돌아가지 않을 굳은 믿음과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거룩한 성도로서의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도의 거룩함에 대한
 온전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데살로니가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주의 메시지를 귀담아 거룩한 성도의 생활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