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데살로니가강해

(살전2:8)너를 사모하는 이유

이요나 2007. 2. 27. 12:26

(살전2:8)너를 사모하는 이유

(살전2: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증거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가 됨이니라
 

오늘 우리가 살펴볼 1장 10절에는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증거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가 됨이니라"하였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사모의 관계라 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 세상 살아 가면서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인간의 관계 중 제일 먼저 시작되는 것이 부부가 되겠지요. 부부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모'라는 단어가 출발된 사이기도 합니다. 그로부터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형성되고 형제가 설정됩니다. 그리고 사회적 구조속에서 사제, 친구, 동료의 관계가 설정되지요. 


그러나 사모의 마음은 모든
 사람들 관계 속에서 생기는 마음은 아닙니다. 사모는 고귀한 인격적인 만남 가운데 형성된 사랑의 결정체로서 그안에는 존경과 경애와 신뢰가 함께 합니다. 따라서 사모의 마음이 있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희생할 수 있는 용기와 열정이 생기지요. 그 이유는 단지 상대가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이런 사모의 관계가 성립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하셨고 그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 준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처음부터 사랑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는 주께서 떠나실 때가 된 줄 아신고로 그의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기록되었습니다. 겟사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들으며 그가 얼마나 그의 제자들을 사랑하였는가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요17:9)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해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주께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자기의 몸을 십자가에 던지신 후에야 그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모하는 자가 되어 그 사랑을 다시 그의 제자들에게 주었습니다.

최근 우리 사역자들 사이에 이러한 사랑이 식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복음 안에서 스승과 제자의 역활이  없어지고 씨스템 속에서 사역자들이 탄생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최근에 와서 주님과 제자들 사이에 형성된 사랑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아직도 나는 내가 하나님의 복음과 목숨을 다 줄 수 있는 사랑하는 자 한 사람을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모가 자기 자식을 기름과 같이(7)
바울은 6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 그러나 너희에게든지 다른 이에게든지 사람에게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고"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도란 보내심을 받은자입니다. 즉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받은 하나님의 대리인입니다.

그 위치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직위로도 비교할 수 없는
 거룩한 영광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기업을 물려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랑에게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유순한 유모'의 위치로 물러났습니다.

 또한 이것은 복음사역의 원리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너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말하며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하였습니다.

 먼저 바울은 자신들의 사역적 위치를 유모에 비교하였습니다.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7절)하였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유순한 자'라 하였습니다.

 이 말은 유모의 성품을 말한 것으로 유모의 성품이 어린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어떠함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젖먹는  
어린 아이가 제일 많이 대하는 사람은 유모입니다. 따라서 유모의 성품은 어린아이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따라서 유모의 자질은 그 첫번째가 유순한 성격입니다. 또한 유모는 자기 아이에게 풍부한 젖을 먹이게 하기 위하여  채용된 사람으로 먼저 아이를 낳아 본 경험과 또 현재 아이를 낳은 건강한 여인으로 풍부한 젖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유모로서 자기 자녀를 기른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유모이기도 하며 또 어미이기도 한 입장을 언급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이를 양육하는데 모성애적인 본능과 이성적 객관성을 동시에 요구한 것입니다.

어머니의 경우 자신이 낳았다는 생각에 빠져 아이를 자신의 소유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따라서 삶의 환경에 따라 자기의 마음의 상태가 여과없이
 아이에게 전달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아이의 인격 형성에 이상이 생기게 됩니다. 성경은 자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태의 열매라 기록 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식은 하나님께 위탁받은 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유모라 할 때 자기 몸으로 낳은 아이의 고귀한 생명을 기억하며 주인의 뜻을 따라 성심으로 아이를 보살피게 됩니다. 또 유모는 자기가 낳은 아이를 기를 수 없는 입장에 있음으로 아이의 생명과 모든 것을
 하나님께 위탁하며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유모로서 자기 자녀를 키운 한 여인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모세의 어머니입니다. 모세가 그 어미에게서 버려져 애굽의 공주의 양자가 되었을 때 그 어미가  유모가 되었던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후일 모세가 성장하여 자신의 영화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유대인의 구원자가 된 것은 어미로서 유모가 된 그의 모친의 긍휼한 기도와 객관적인 사랑의 결과였습니다.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11)
바울은 11절에서 다시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하였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너희 각 사람'이라는 관계 대명사입니다. 이것은 복음의  대중상과 객관성을 함께 언급한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이 전체적이고 대중적인 것을 알 고 있습니다. 복음은 모든 인간을 위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의 인격이므로
  사람과의 만남에 있어 개인적인 인격적  만남으로 성취됩니다. 이것이 말씀 가운데 역사하는 성령의 나타나심으로 우리는 전도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복음의 속성을 망각하여 복음의 대중성에 치우치려 합니다. 저는 종종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사거리에 붉은 띠를 메고 커다란 십자가를 메고 목이 터져라고 외처대는 쉰 목소리를 듣곤 합니다. 그들은 계속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외치며 십자가를 강조하지만 글쎄요 과연 그들의 외침이 복음의 역활을 하는 것인지 의문스럽습니다.

바울은 '각 사람에게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이라 하였습니다. 이는 자신이 대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에 있어 자기 아들을 대하는 아비의 입장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권면과 위로와 경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권면'이란 격려하고
  타일러서 어떤 일에 힘쓰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권면이란 그 모든 격려와 권고가 성경의 가르침을 토대 된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권면하는 자가 성경적으로 조명을 받고 살고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또 '위로'란
  위안(comfort)과  권고를 포함한 말입니다. 따라서 '위로'는 과거형이 아니라 미래 지향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아버지의 '위로'는 위안과 권고를 받아 지난 것을 떨쳐버리고 앞으로 나아가는 희망과 용기를 부여하게 됩니다.

우리나라는 오랜세월 유교의 가부장적인 사고가 있어서 자식과 아비의 관계가 근엄과 위엄의 관계만을 유지해 왔습니다. 그 결과 자식들은 아버지에게 위로를 받지 못하고 다만 어미의 치마폭에서 감성적으로 치우친 사랑만을 받고 성장하여
 성격이 급하고 날카롭습니다.

끝으로 바울은 아비의 '경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경계'(worning watch)란 두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데 그 하나는 '범죄나 실수가 되지 않도록 미리 마음을 가다듬는 '이며 또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미리 타이르고 조심 시키는 일'로서 경고와 책망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다'(시19:11)하였으며 잠언기자는 '훈계를 저바리는 자에게는 궁핍과 수욕이 이르거니와 경계를 지키는 자는 존영을 얻느니라'(잠13:18)하였습니다.
 또 이사야 선지자는 자식을 가르치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라'(사28:10)고 강조하였습니다.

바울은 12절에서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하였습니다. 합당이란 말은 '가치있고 적절하게'라는 뜻입니다. 자기 신분에 맞는 언행을 의미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 합당치 못한 언행을 일삼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