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전2:19)너는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느냐?
(살전2:19)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우리는 앞에서 복음의 위탁자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어떻게 이방인 가운데 들어 갔으며 그들 앞에 어떤 모습이 되었는지를 살펴 보았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옭고 흠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증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2:10)증거하였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최선을 다한 복음의 위탁자들이 그들의 제자이며 하나님의 성도인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르침을 받은 성도로서 마땅히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복음의 인격과 책임(13)
바울은 13절에서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하였습니다.
이것은 복음의 완성을 위해 복음의 위탁자가 하여야 할 것과 또 복음을 전해 들은 자들의 쌍방적 책임과 의무를 언급한 것입니다. 바울은 먼저 복음 전한 자로서 쉬지 않고 감사한다고 하였습니다. '쉬지 않고 감사한다'는 말씀 속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쉬지 않고 역사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복음이 이론적인 학문이 아니라 복음을 들은 사람들 속에서 역사하는 인격체이심을 깨닫게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복음은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 속에 역사하는 살아있는 인격이시듯이 복음의 결실은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 전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구원의 은혜가 일방적이지 않은 것을 감사 드립니다. 그것은 내가 주를 나의 구주로 영접함으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믿음의 확신을 갖을 수 있게 하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느 교파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나의 의지적 선택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예정하심 가운데 구원을 받았다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감사할 필요도 없고 또 믿음을 얻기 위해 투쟁할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 더욱 감사하는 것은 우리가 복음의 위탁자들로 받은 말씀이 아직도 내 속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말씀이 살아 있을 때에만 가능하고 그의 사랑이 변치 않고 있다는 위대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복음의 모델(14)
바울은 14절에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저희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을 받았느니라"(14) 하였습니다. 지금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주께서 친히 세우신 유대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모델이 된 것을 언급한 것입니다.
주님은 떠나가시기 전날 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내가 너희의 주와 스승으로 너희 발을 씻겼은 즉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며 '내가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본을 보였노라'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에게는 그 기준에 해당하는 모델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온전한 모델이 되기 위하여 한가지 더 중요한 것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격어야할 고난입니다. 고난은 우리 육체로 겪어야만 하는 복음의 필수 과정입니다. 따라서 주께서 우리의 믿음을 위해서 주신 고난은 누가 대신 할 수 없는 축복의 길입니다.
최근 많은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을 잊고 있습니다. 어쩌면 축복이라는 말에 취하여 고난이라는 단어는 일부러 잊어버리려 하는 것 같습니다. 또 어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의 고난을 다 지셨으므로 우리에게는 고난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하였으며 다시 로마교회에게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7) 하였습니다.
계속하여 바울은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전에는 이 말씀을 읽으며 이 말씀은 복음의 박해를 받는 때에 국한된 말씀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얼마전 미국에 머물며 말씀에 갈급한 사람들과 성경공부를 시작할때 나타난 일들을 생각하니 예수와 선지자를 죽이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쫓아낸 사람들이 이방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인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 얻게 함을 저의가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기록하였습니다.
*면류관 누구의 것인가?(17-20)
바울은 17절에서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의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복음을 방해하는 세력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하였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삼팔선을 사이에 두고 서로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산가족들의 상봉장면을 볼 때마다 그들이 서로 얼마나 보고 싶어 하였으며 서로 만나기 위한 열정이 반세기 동안 식지 않았음을 가슴으로 느끼게 됩니다. 남과북 사이에 이념이 가로막고 있듯이 복음의 세계에도 대적하는 영이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최종적으로 우리가 받을 면류관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하였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들을 향하여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이라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와 같은 곳에서는 영광의 면류관이라는 말이 또다른 방향에서 해석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북한과 같은 독재자의 체제속에서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이란 말보다 더 큰 위로와 소망의 말은 없을 것입니다.
면류관은 그리스도의 날에 주로 부터 받는 최고의 영예의 상입니다. 바울은 이 날에 받을 상에 대하여 여러 사람이 달릴지라도 상을 받는 자는 하나라고 하였으며 또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하지 않으면 상을 받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나는 오늘 이 글을 쓰면서 10년 동안 내가 해온 일들이 모두 무너지는 것 같은 아품을 느낍니다. 복음의 위탁자로서 충실한 역활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복음의 위탁자와 또한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자로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다시한번 자신을 돌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하심이 세세토록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신약강해 > 데살로니가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살전2:4)복음의 위탁자 (0) | 2007.02.27 |
---|---|
(살전2:8)너를 사모하는 이유 (0) | 2007.02.27 |
(살전3:10)온전한 믿음과 거룩한 생활 (0) | 2007.02.27 |
(살전4:3)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0) | 2007.02.27 |
(살전4:3) 하나님의 뜻(1) (0) | 2007.0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