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데살로니가강해

(살전1:3)믿음의 현실과 증거

이요나 2007. 2. 27. 12:27

(살전1:3)믿음의 현실과 증거

(살전1:3)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사도행전
 16장에는 바울의 마게도냐 입성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바울은 루스드라와 이고니온 지역을 돌아 브르기아와 갈라디아를 거쳐 무시아를 통하여 본도와 비두니아 지역으로 들어 가고자 했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허락치 않으시고 바울을 마게도냐로 향하게 하여 바울은 일행은 빌립보로 들어 갔습니다(행16:6-10).

 유럽전도의 시작

바울이 빌립보에 들어가서 유대인 여자 루디아를 만났고 헬라 점쟁이 여인을 만나 그녀에게 역사하는 귀신을 쫓아 내었습니다. 그로하여 그녀에게 점을 보아 이익을 보던 빌립보 성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바울과 실라와 누가는 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행16:11-18).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혀
 주를 찬미할새 지진이 일어나 옥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부서지는 역사가 일어 났습니다. 그들을 지키던 로마 간수가 혼비백산하여 자결을 하려할 때 바울이 그를 만류하여 복음 전하여 그를 구원하였습니다. 이로서 바울의 일행은 그 지역의 두려운 존재가 되었습니다(행16:19-34).

그후 바울 일행은 로마간수들의 권고를 받아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로 올라 갔습니다. 그 당시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의 수도로서 로마와 아시아를 잇는 군사, 교통 상업적 중요 도시로서 그리스 다음의 두번째 큰 도시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오늘날 유럽의 관문으로서
 바울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들어간 마게도냐 지역의  빌립보 교회 다음에 개척한 교회입니다. 데살로니가는 헬라를 일으킨 알렉산더 대왕의 장군 중 한 사람인 카센더 장군이 세운 곳으로 빌립의 딸로서 알렉산더 대왕의 배다른 여동생으로 자신의 아내가 된 공주의 이름을 붙인 곳으로  20만의 인구를 거느린 거대한 자유도시였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이르자 그곳의 유대인 회당에서 세 안식일 동안 성경을 강해 하였습니다. 누가는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그리스도라 하니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았다"(행17:3-4)기록하였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일어나 그들이 묵고 있었던 야손의 집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어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결귝 바울은 그곳에 데모데를 남겨두고 실라와 함께 베뢰아 지역으로 물러나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에게
 훼방을  받아 아덴으로 들어가 실라와 디모데를 오게하여 함께 고린도 지역으로 들어갔습니다. 


 바울의 동역자들
바울은 1절에서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편지는 바울과 그의 동역자 실라와 디모데가 함께 전한 것이 되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여기에 기록되지 않은 한 사람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바로 사도행전을 기록한 의원 누가입니다.

바울을 동역자인 실루아노는 실라의 라틴식 이름으로 2차 전도여행부터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신실한 복음 전도자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라는 뜻을 가진 디모데는 루스드라 태생으로 유대인 어머니와 헬라 아버지 사이에 태어났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제자로 부름에 있어 그의 아버지가 헬라인이므로  할례를 행하여 유대인의 오해를 덜었습니다(행16:3).

바울은 먼저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의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였습니다.
 인사의 수단으로는 은혜는 헬라인들의 인사법이고 평강은 유대인의 인사법입니다만 교회시대에 와서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과 성도들의 온전함을 기원하는 인사가 되었습니다.

2절에서 바울은
 그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늘 감사하고 기도하였음을 언급하였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에 대하여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감사란 그들의 믿음 가운데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 것이고 기도란 그들이 아직 이르지 못한 믿음의 목표에 대한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대한 고찰
바울은 3절에서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도함이니"기록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최고의 은사인  믿음과 사랑과소망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기도제목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 그리고 '소망의 인내'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믿음의 역사'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은사만를 언급한 것 뿐이 아니라 믿음으로 나타나는 사역적 행위와 열매를 모두 언급하는 것입니다. 또 '사랑의 수고'란 이미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난 바 된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개념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나타날 실제적 사랑의 행위와 열매를 말한 것입니다.

또한 '소망의 인내'란 장차 그리스도의 날에 임할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만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그 영광을 위하여 우리가 마땅히 격어야할
 고통스런 환경 들을 능히 참고 견디는 능력을 말한 것으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감사의 생활에 속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계속하여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지속되기를 기원하는 바울의 기도로서 우리는 이 말씀 속에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4절)하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성경 편집자가  이 말씀을 3절에서 분리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3절과 4절에서 문절이 내포하고 있는 저자의 의도를 생각해 낼 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불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비된 인간의 속성입니다. 사실 이러한 말투는 여러 서신 속에 나타난 바울의 반어법으로서 실제로는 그들 가운데 나타난 신앙의 모순점들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과 큰 확신들
바울은 5절 서두에서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지금까지 너희가 실제로 체험한 능력과 성령의 나타나심과 그로 하여 얻은 큰 확신들 즉 진리의 깨달음을 벌써 잊었느냐' 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3절의
  '하나님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한다'는 말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열정적이고 불변의 신앙을 요구한 것으로 만약 변하기라도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행위를 기억하실 것이라는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바울의 기도제목인 그들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한다'는 말씀 속에서 우리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신앙에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무엇인가 적신호가 감지되고 있음을 암시한 것입니다. 

  믿음의 동역자와 믿는 자의 
바울은 6절에서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그들이 믿음의 사람이 되기까지 많은 환란을 겪었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믿는 부모님 밑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성도들은 정말 복있다 하겠습니다. 그야말로 이삭의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와 같이 우상을 섬기며 세상 신의 세력의 지배를 받던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온전한 믿음에 도달하기 까지의 영적투쟁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 환난은 우리의 의지적 결단으로만 이겨낸 것이 아니라 친히 고난에 참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속에 동참하신 성령의 기쁨과  그들을 주께 인도한 사역자들의 모범적이고 헌신적인 봉사가 함께 이루어 낸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 앞에 선 사역자들은 어떤 모습일까요?
 혹시 대부분의 성도들은 사역자들의 아름다운 모습과 넉넉한 모습을 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복음의 일군들은 모두 인간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너희가 세상에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노라"(요15:19)하시며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하셨습니다.

 믿음의 균형과 지속성
바울은 8절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실천적 믿음이 마게도냐와 아가야 일대에 퍼지고 있으므로 우리가 더이상 아무말도 할 것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후일 다시 확인 될 그들의 믿음의 소문에 대한 책임을 요구한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 가운데는 정말 믿음의 굴곡이 너무 심한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저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만 무엇인가 마음에 드는 일을 만나면 당장 목숨이라도 버릴 것처럼 달겨들다가도 무엇인가 자기 마음에 싫은 것을 보게되면 하루 아침에 헌신짝처럼 내 동댕이치고 돌아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갈보리채플 사역을 하면서 정말 힘든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들이 처음 나를 대할 때 얼마나 열정적이였든지 이제야 진실한 제자 하나를 만났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환난이 다가오자  인내하지 못하고 자기 길로 돌아 가 버렸습니다.

바울은 9절에서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 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하였습니다. 바울은 지금 그들이 온전한 구원을 얻기까지 그들 가운데 행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생활을 하면서 복음이 어떻게 자신에게 이르렀으며,
 또 자신이 어떻게 구원에 이르렀는가에 대한 생각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현실주의자가 되어갑니다.  나는 정말 자식처럼 아끼며 가슴에 둔 두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견딜 수 없는 환경과 육체적 속성에서 많은 환난을 겪든 중
 우리 가운데 역사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성령의 기쁨으로 우리 가운데로 나아와 함께 믿음의 투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를 견디지 못하고 자기의 길로 돌아 갔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나를 대적하기까지합니다. 차라리 만나지 않은 것만도 못한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믿음의 현실과 깨달음의 장애
바울은 마지막 절에서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발생된 문제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사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믿음은 종말론적인 지식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은 종말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3주 묶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고 데모데가 남아서 복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를하였지만 그들의 믿음은 조급하여 장차 임할 그리스도의 날을 인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왜 그들은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갖지 못하였을까요? 바울이나 데모데가 미처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지 않은 까닭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리고 있음을 칭찬하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믿는 사람들이 믿음의 결국, 곧 그리스도의 재림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믿음의 속성은
 점점 종교활동으로 떠밀려 가고 있습니다. 믿음의 결국이 우리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맞는 것이라 할 때 우리의 믿음은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문제점과 미처 깨닫지 못한 지식이 무엇인가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