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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14:17) 삶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

이요나 2007. 2. 27. 13:42

(로마서14:17) 삶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

 

(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로마서 14장입니다. 이제 앞으로 두 주일이면 로마서를 마치고 고린도서로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주일예배에서는 지금 예레미야가 시작되었습니다. 내년도 이 맘때 쯤이면 우리는 계시록을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요즘은 예레미야와 로마서 설교 준비로 하루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어깨도 아파오고 가끔씩 고질병인 편두통이 일어나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면 올여름 잔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지낸 것을 정말 감사할 뿐입니다.

 

로마서 14장도 12장부터 이어지는 삶속에 속한 영적예배(합당한 예배)에 대한 명심보감입니다. 지난 주 13장에서는 우리의 삶이 피할 수 없는 세상의 권세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세상 질서 속에서의 우리의 삶의 태도를 설명한 바울은 이제 우리의 믿음의 세계속의 많은 이웃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삶이 세상의 권세 속에도 있고 믿음의 세계에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권세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질서도 중요하고 또 믿음의 세계속에서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과의 질서 또한 매우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은 먼저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고 권면합니다. 이 말씀은 믿음의 지식에 이른 사람들의 삶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한계속에 있습니다. 따라서 무엇인가 연구하고 살펴서 깨달음에 이른 사람도 있고 아직 그 알고자 하는 바를 완전히 깨우치지 못하여 미숙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만약 지식인들이라 하여 지식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경멸한다면 사회의 질서는 그야말로 무질서에 빠져 버릴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의 세계 또한 믿음의 경지에 도달한 자는 아직 그 지식에 이르지 못한 자들을 이해하고 용납하여야 할 것입니다. 주께서는 마태복음 7장에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그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7:1,2) 하셨습니다. 또 계속하여 "어찌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하셨습니다.

 

바울은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믿음이 연약한 것을 동정하거나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 바울은 우리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또 바울은 에베소서 4장에서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주께서 교회에 사역자들을 두셨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그 지식에 도달하기를 바라는 소망이고 기도이지만 성경이 요구하는 지식에 동시에 이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바울이 연약한 믿음이라고 지적하는 부분들을 살펴 보십시다

 

바울은 3절에서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는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구약의 율법에 적힌 고기들을 먹지 못하게 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우리교회 박성근 할아버지는 안식교 교단의 건강세미나에 다녀 오신 후부터 고기를 일체 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맛있는 고기를 먹기를 좋아합니다. 아직도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나 비늘 없는 생선을 먹지 않습니다. 구약의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고 수천년 동안 그들은 그 율법을 지켜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그러한 법이 없음으로 먹고 마시는데 규제가 없었습니다.

 

교회가 탄생 이후 이 문제는 커다란 이슈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예수를 영접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이 교회에서도 실질적인 세력을 구축하였고 이러한 음식의 문제는 유대인과 이방인 성도들을 둘로 나누는 계기가 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않되었겠지요, 사도행전 15장에는 유대인들이 제기한 모세의 율법으로 안디옥 교회에 커다란 문제가 발생되었습니다. 이 문제는 결국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되었고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의 입술을 통하여 "이방인 교회에 피와 음행과 목매여 죽인 것을 삼가하라"는 회람을 돌리게 하므로서 일단락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교회 속에서 수천년 동안 지켜 온 율법적 관습들의 마찰은 끊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중에 가장 큰것이 먹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4절)고 말하였습니다. 그러한 대도 아직 우리 가운데는 이러한 것으로 서로 판단하며 이단으로 규정하는 풍조가 남아 있습니다. 또 바울은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섯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잇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새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자신의 위치와 소속에 대한 엄한 경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8년전 서울에서 갈보리채플을 개척할 때였습니다. 많은 사역자들이 갈보리채플의 예배 모습으로 보고 경멸하였습니다. 단상도 없고 강대상도 넓지 못하고 설교하는 목사가 자유복장을 입고 나서기 때문이지요,,. 또 나의 경우는 때때로 설교중 주머니에 손을 넣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그들에게는 못마땅하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두번째로 바울은 교회에서 지키는 절기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혹은 이 날을 저날 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아마 그당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유대인들 중에 그동안 조상대대로 지켜 온 절기를 그냥 지내쳐 버리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그러한 절기를 지키지 않으니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참으로 곤란한 입장에 처하였을 것입니다.

 

제가 순복음교회에 다닐때였습니다. 그 때 조용기 목사님은 추석명절에 제삿상을 차리는 것을 잠정적으로 인정하는 설교를 했습니다. 그래서 장로교에서는 그것을 들고 나와 조용기 목사의 이단성을 시비하였습니다. 저도 추석에 고향을 방문하면 참으로 곤란한 지경에 이를 때가 있습니다. 머리가 허연 집안 어른이 집도하는 제사상에 서서 목사라고 버티어 절을 않할 수도 없고 하자니 성경의 말씀이 다가오고 참으로 죽을 맛이지요.

 

그러나 바울은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하였습니다. 참으로 얼마나 배려와 관용이 가득한 사랑의 권면입니까? 그러나 이것을 잘못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바는 근본적으로 그러한 일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의 실천이 앞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주 앞에 공평함을 설명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주께서 용납하신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판단한 권한이 없음을 말한 것입니다. 계속하여 바울은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하였습니다.

 

요즘 어떤 고약한 사람들이 성경말씀을 한두 구절 들고 나와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 죄사함을 받았는가? 라고 묻습니다. 참으로 당돌하고 혹세무민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그들은 자신들만이 구원을 받은 것처럼 더 나아가서 자신들이 구원을 시킬 수 있는 것처럼 떠들어 댑니다. 그러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주시는 하나님의 권세인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 속되니라" 하였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양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하게 말라"고 경고합니다.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주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셔서 우리로 영원한 생명이 들게 하셨는데 먹고 마시는 일들의 규범 때문에 형제를 판단한다면 이것은 오히려 그 자신이 그리스도의 지식과 자유함에 이르지 못한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하였으며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였습니다. 성경에 모든 규범은 우리의 보다 나은 믿음생활을 위해서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아직 믿음이 그 지식에 도달하지 못하여 그 진리의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또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두편이 모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여 받으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였습니다. 또 "믿음으로 하지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요즘 크리스마스에 대하여도 말이 분분합니다. 어떤 교회는 크리스마스를 거대하게 기념합니다. 그러나 우리 갈보리 채플은 오히려 충동하지 말고 조용한 마음으로 주의 오심을 감사하라고 가르칩니다.

 

사실 크리스마스는 비성경적인 부분에 속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안다고 하여 자신들만이 올바로 된 믿음의 사람인 것처럼 큰소리로 외치며 크리스마스를 지키는 교회를 비방하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못됩니다. 모두가 온전한 지식이 이르기까지는 우리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다음주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