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로마서강해

(로마서13장) 권세와 그리스도인의 삶

이요나 2007. 2. 27. 13:43

(로마서13장) 권세와 그리스도인의 삶

 

(롬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이 정하신 바라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영적예배(합당한 예배)가 어떤 것인가를 살펴 봄으로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우리는 한계속에 속한 연고로 보고 듣고 터득한 그 범위 내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그 예배는 그 예배의 본질이 우리의 생각과 제도적인 형태로 들여지는 예배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믿음의 분량을 따라 나누어 주신 은사로 나타나는 신실한 우리의 믿음의 형태임을 알았다.

 

또 우리의 예배는 일정한 범위를 가춘 성전에서의 예배 행위가 아니라 우리 삶 전체를 통하여 우리와 이웃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나야 하는 진실한 사랑의 실천임을 생각할 때 우리가 오늘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정말 수치로운 자신의 종교활동이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바울은 우리의 사랑의 실천 범위에 대하여 성도는 물론 일상 속에서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손님) 그리고 우리를 핍박하는 자와 우리와 원수의 관계를 가진 자들에게까지 나타나야 할 것을 요구하며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말하였고 다시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12:17-18) 기록하였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부분은 12장에서 연결된 영적예배의 실천 요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주어지는 영적 세계 속에 속한 것이지만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의 날까지 결국 세상 가운데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바울은 먼저 우리 인간의 모든 삶을 지배하는 권세 즉 정치적인 부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사실 정치란 지배의 권위를 말하는 것인데 이 지배의 권세는 하나님으로 부터 나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신령한 자 아담에게 주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아담의 불순종으로 이 권세는 사단에게 주어지고 죄의 인간들은 모두 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세상의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라 기록하였다. 이것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성경은 이미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11:36) 기록하였고 하늘 보좌에 앉으신 주의 사자들도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4:11)고 증언하였다. 따라서 비록 주의 오심까지 사단이 죄의 세상을 지배하고 있으나 천지만물의 모든 권세는 영원하신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바울은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롬13:2) 말하였다. 어쩌면 이 말은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받은 그리스도인들로서 납득이 잘 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 보편적인 세상의 이치를 말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에게 삶의 지침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이 말을 하게 된 동기를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믿는 자들에게 주신 많은 은사를 주셨음을 증거하였다. 이러한 은사들은 하나님의 신비의 세계에 속한 것들로서 세상 사람들에게는 실로 기이한 일이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큰 사람으로 인정받던 마술사 시몬까지도 사도들에게 나타난 은사를 돈으로 사고자 했던 것을 생각할 때 우리가 받은 성령의 은사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요술방망이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능력에 대한 세상의 반응을 따라 교만한 충동에 빠지면 사도행전 12장에서 소개된 헤롯과 같이 자신에게 주신 권세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음으로 하여 벌레에게 먹혀 죽게 될지도 모른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나심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 증언하였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성령의 능력을 자신의 권세로 알고 사용한다면 결국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 된다. 사실 이러한 조짐은 주께서 살아 계실 때 부터 나타났었다. 바로 주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과 그의 형제 야고보가 주께 나아와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달라"(막10:37) 하였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들은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10:42-44)고 경계하셨다.

 

또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날 유월절 만찬을 드신 후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기시면서 내가 너희의 주인과 스승으로서 본을 보였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13:14-15) 하셨다. 이것은 그의 죽음에 앞서 하나님의 나라를 그들에게 맡기면서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의 상태는 어떠한가? 모두가 서로 최고의 자리를 두고 다투고 있지 안는가? 오늘날 우리는 서로의 발을 씻기는 장면은 청소년 수련회의 코스로 전락하고 교회 가운데서 주님이 친히 행하신 일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 하나님을 믿는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정치 일선에 두각을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종교가 서로 연합하여 함께 정치적 시녀가 되고 있다. 그러하여 어떤 이단들까지 최고 지도자들의 선까지 로비활동을 하며 안하무인으로 자신들의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

 

바울은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들의 태도에 대하여 먼저 관원들은 권세를 거스리는 자들에게 두려움이 된다고 설명하였다. 그가 비록 악한 자라도 그에게 있는 권세는 그로하여금 악과 선을 응징하고 있음을 설명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권세란 결국 그 권세를 집권할 법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법은 그 집행자와 백성들과의 합의로서 권세자들은 그 법의 질서를 따라 권세를 집행하게 된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라 하여 권세자가 세운 법의 질서를 무시한다면 결국 커다란 충돌을 일으키고 말 것이다. 그런데도 어떤 몰지막한 종교가들은 세상의 질서를 역류하여 대항하며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도들을 이용하고 있다. 이들을 향하여 바울은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모든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를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되 두려워 할 자를 두려워 하고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이것은 법의 질서 수행에 기본적인 것을 설명한 것이다. 최근 교회는 면세의 특혜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 특혜에서 제외될 지도 모른다. 또 교회는 집단적 힘을 과시하여 정치적 세력을 부리기도 하는데 언젠가 이것 또한 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또 지금 교회 지도자들은 스스로 존경의 위치에 있는데 언젠가 이것 또한 벗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한 날이 이르면 교회는 자신의 교세를 과시하여 정치세력과 대항하며 성도를 선동할 것이다. 사실 중세 시대에는 종교가 국가의 시녀가 되어 마냐사냥이란 미명으로 정치적 정적들을 제거해 왔었다. 지금 교회는 최고의 교만한 위치에 올라 와 있다. 그러나 세상의 권세는 결코 순수히 그 권세를 교회에 고스란히 넘겨 주지는 않을 것이다.

 

바울은 두려워 할 자를 두려워 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최근 들어 민권이 강화되고 교회가 대형화 되고 교회들이 민중 세력과 손을 잡고 정부를 상대로 항쟁을 하고 있다. 또 중동 전쟁을 살펴 보아도 종교지도자들이 앞장서서 자신들의 정치적 생명을 위해 전쟁을 선동하고 있다. 이처럼 종교적 교만은 두려움을 상실해 가고 있다 또 많은 지도자들이 스스로 존경의 위치에 서기 위하여 세상의 능력들과 손을 잡으며 존경받을 만한 자들을 오히려 멀리 하려고 한다. 빌립보 교회는 그러한 부유함과 지식적 역량을 과시하면서 에바브로 디도와 같은 충실한 종들을 중히 여기지 않았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너희는 이러한 자들을 귀히 여기라"고 말하였다. 우리 가운데는 실로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은 존경 받을자의 위치가 물질과 권세로 자우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삶 속에서 무엇을 중요시 하여야 할 것인가? 먼저 바울은 8절에서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교회가 받기를 좋아하는 습성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교회는 지금 너무 많은 특혜를 누리고 있음에도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가 특권을 많이 누리면 누릴수록 정치적 집단의 시녀가 되고 있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결국 어느날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질질 끌려 다니게 될 것이다.

 

또 바울은 10절에서 악을 행하지 않아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에 악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몇해전 일어난 옷로비 사건을 보라 얼마나 수치로운 일이며 어느 교회의 mbc 제작실 점령 사건이라든가 이 모든 일들은 참으로 보기에도 역겨운 작태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얼마전 우리 카페 게시판에서 어느 형제의 어머니께서 같은 교회의 집사라는 분에게 당한 카드 사기에 대한 글을 읽었다, 참으로 가슴 아픈일이 아닐 수 없다. 또 요즘 어느 목사는 교회 재정과 건축을 명목으로 성도들에게 다단계 판매를 조직하기도 한다. 그들은 모두 입으로는 사랑을 외치지만 양의 털을 깍는 도적들이 틀림없다.

 

둘째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구원의 시기가 가까웠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 시기는 그리스도의 공의를 따라 심판 될 것임을 이미 공포되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우리가 다 반듯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고 증언 하였다. 실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떠나 세상에 물들어 가고 있다.

 

누가 그리스도인이고 누가 믿지 않는 자인지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우리의 믿음의 세계는 혼탄해 지고 있다. 바울은 단호하게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외치며 빛의 갑옷이란 세상의 유혹을 막을 수 있게 때문이다

 

바울은 믿는 우리에게 정욕을 위해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말하며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라" 경계한다. 이것은 사실 믿지 않는 자들도 삼가하는 일들이다. 하물려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일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말하고 있는 것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 이유는 오늘날 우리들 가운데 이러한 일들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실 날이 가까웠다. 당신은 그의 심판대에 서지 않을 수 있을 것인지 자신을 돌아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