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로마서강해

(롬12:1-2) 영적예배(reasonable service) 2

이요나 2007. 2. 27. 13:44

(롬12:1-2) 영적예배(reasonable service) 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에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오늘은 로마서 12장 영적 예배 두번째 시간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바울이 왜 그토록 유대인에 대하여 역설하였는가를 추론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상기하여야 할 것은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개인적인 신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방인을 위한 부르심을 받은 사도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궁국적인 바울의 목표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 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지만 우리는 사도행전과 사도 서신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땅에서 얼마나 방해를 받고 있는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바울이 목숨을 바쳐 세운 그리스도의 교회가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교사들을 통하여 얼마나 왜곡되고 그로하여 교회는 사단의 충동을 받아 걷잡을 수 없는 내리막길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풍전등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무너질 수 없는 진리이며 그를 수호하는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지키는 성도들 속에서 굳건히 자라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12장에서 우리에게 영적예배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적예배라는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의 소지를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목사들이 영감있는 예배를 주장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주장하는 영감있는 예배에서 영감있는 찬양, 영감있는 기도, 영감있는 말씀선포를 만나보지 못하였습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영적예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외형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먼저 킹제임스 성경은 우리가 말하는 영적예배를 합당한 예배(reasonable service)로 번역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적예배란 합당한 예배라는 의식을 갖을 필요성이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그 합당한 예배를 설명함에 있어 우리의 몸을 산제사로 드리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신령한 예배를 설명함에 있어 우리의 몸에 비교한다는 것은 좀 이해가 되지 않겠니다만, 우리가 우리 몸에 비교하는 것만큼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는 비유도 없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바울의 의도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몸을 주셨음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당시 헬라의 철학자들은 우리 몸은 물질로서 부패하고 악하다고 정하였습니다.

 

오직 영만이 정결한 것이라는 잘못된 가르침이 만연하여 유혹에 빠지기 쉬운 연약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을 유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잘못된 가르침은 지금도 남아 있어서 우리의 육체는 썩어 없어질 것으로 아무렇게나 되어도 좋다고 하는 거짓교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실 때 영혼과 육을 창조하셨습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 오기까지 인간은 하나님의 지으신 거룩한 그릇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에 합당한 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너희 몸을 산제사로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몸입니다. 바울은 이 몸의 속성에 대하여 7장과 8장에서 리얼하게 파헤쳤었습니다. 이 몸은 우리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스스로 다스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차라리 심장이나 뇌와 같이 하나님께서 완전히 주장하여 주신다면 좋겠는데, 우리 몸의 어느 부분은 자기 스스로도 억제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분명히 내것임에도 불구하고 억제와 자재가 되지 않고 계속 악한 행위로 미끄러져 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8장에서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듯이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롬8:13) 경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한바와 같이 " 너희 몸을 산제사 드리라"는 권고는 육체로 고통받는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고 가장 좋은 예배의 방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몸을 어떻게 하나님께 산제사로 드려야 하는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천년동안 짐승들의 제물을 하나님께 드려서 그 방법을 잘 알수 있는지 모르겠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산 제사를 드리는 방법에 대하여 매우 난감합니다. 그러나 걱정할 것 앖습니다. 우리는 그 방법을 몰라도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받으시는 산제사는 이미 에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자신의 몸으로 드렸기 때문에 우리의 더러운 육체는 하나님 앞에 드릴 필요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은혜로 거룩하심을 얻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함께 거룩하게 된 성결한 몸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거룩한 그리스도인들만이 살도록 조성된 곳이 아니라 사단이 지배하는 죄많고 음란한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한발자국만 내 디디면 사단이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를 더럽히려고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또 우리 육체 속에는 아직 죄의 속성이 남아 있어서 우리가 세상의 요구를 바라보기만 해도 어느새 그 더러움이 우리 마음 가운데 들어와 우리 자신이 스스로 범죄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이러한 모든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 산제사 드리는 그 영적인 예배의 합당한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중요한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몸이라는 존재는 어떤 행위를 본받기에 익숙하다는 것입니다. 어느 것을 본받는다는 것은 기계적이고 조직적이라는 의미도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몸은 물질입니다. 물질 속에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낡고 썩어질 한게성 물질임에는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실 때 무엇에 따라 배울 수 있도록 입력체계와 명령체계와 수동체계로 디자인 하셨습니다. 따라서 보고 배우고 터득한 것은 바로 우리 뇌에 입력되고 삶의 필요에 따라 명령체계가 자동으로 발동되어 우리 몸은 자동으로 그 명령을 따르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잡히시기 전날밤 제자들의 발을 손수 닦으시면 내가 너의 주인과 스승으로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그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은 섬김의 도리를 직접 가르치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말로 가르치셔도 될 것을 친하 수건을 드리고 발을 씻기신 것은 우리가 생각한 그 이상의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세상의 속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원래 세상의 속성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가 아닙니다. 만약 사단이 세상에 들어와 죄의 세상을 만들지 않았다면 우리는 악을 모른채 선한 하나님의 질서가 우리 몸에 배여 우리의 모든 언행과 삶의 질서는 아름다움 그 자체일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세상에 들어 온 이후 사단은 세상의 임금이 되어 육체의 속성을 사로잡기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두번째로 바울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권합니다. 이것은 몸의 산제사를 위하여 먼저 우리의 마음의 부분이 무엇인가를 결정하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몸은 우리의 생각을 따라 움직이는 체제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을 새롭게 바꾸기 전에는 우리의 몸에 배어진 그 습성을 바꿀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나는 오랜 세월 사람을 사랍잡고 있는 악의 세력의 매개체와 싸워왔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술과 마약과 SEX와 싸우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외에 믿는 그리스도인 속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와 다투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 이미 사단의 권세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향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의 아름다운 소식을 통하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자에게 놓임을"(사61:1)받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그러한데도 마음을 새롭게 하라는 바울의 권고는 정말 의미 심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그 믿음의 생활 곳에서 점점 벗어나 세상의 본을 따라 가고 있음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글을 보는 우리 스스로 지금 나는 어떠한 상태인가 생각하면 두렵기한이 없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빛을 잃고 세상의 흐름에 빠져 자신이 이미 세상과 분리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임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오늘 사랑하는 우리 형제가 인터넷에 올려 놓은 가슴아픈 글을 보았습니다. 그 형제는 참으로 성실한 형제입니다. 그의 아바지는 술에 사로잡혀 사랑하는 아내를 구타하고 가족을 돌보지 않은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의 형제 가족들은 그러한 아버지의 행패에 견디다 못해 아버지를 버리기로 작정하고 달흔 지역으로 도망을 하였습니다. 그 형제에게는 또 신체 장애를 가진 형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과 기쁨을 누리고 앞날에 소망을 갖고 살아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 형제가 올린 글은 보는 이로 하여금 분노 하게 하였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의 완악한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보지 않았지만 정말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교회를 성실히 섬기는 집사님이 틀림없습니다. 그의 어머니의 소망은 남편이 주께 돌아 오는 것과 그의 자녀들의 평안함 외에는 더이상 바랄 것이 없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 교회의 집사라는 분이 자신의 카드가 연체된 것을 빙자로 형제의 어머니를 속여 여섯개의 카드를 만들어 500만원의 카드빚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얼마나 분통한 일인지요. 그러고도 그는 집사라 하여 교회에서 봉사를 하고 대표기도를 하고 전도를 하러 나갈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이 사람이 회개를 하지 않고 예수를 믿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왜 그는 세상 사람들과 같은 모습이 되었을까요? 그는 믿은 후에 그의 몸을 하나님께 산제사드리지 않고 세상의 흐름을 타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은 그 마음이 더러워져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기쁜 뜻이 무엇인지 모르고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이미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듯이 죽을 것이라" 선언 하였습니다. 나는 이 분이 진정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 주 앞에 온전한 모습으로 산제사 드리지 못한다면 그 말씀대로 될 것이라 믿습니다(다음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