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로마서강해

(로마서 11 장) 사실은 네가 문제야 (1)

이요나 2007. 2. 27. 13:47

(로마서 11 장) 사실은 네가 문제야 (1)

 

10 장의 끝에서 바울은 주께서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씀하셨고 또 이스라엘에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고 말씀하셨음을 상기 시켰다. 이것으로 우리는 구약에서 이미 이방인들을 복음으로 구원할 것을 언급하셨음과 하나님의 뜻을 떠난 이스라엘을 향하여 사랑의 인내를 인내하셨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자기의 입장을 표명합니다. 그 자신도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소망과 열심을 갖고 섬기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바울은 유대인 속에서 최고의 프라이드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을 배출한 베냐민 족속이었고 또 그 당시 최고의 율법학자 가멜리아의 문하생으로 일찍이 그 후광을 입어 공회원의 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 그는 태어남으로서 로마 시민이 되 자로서 세상적인 학문과 세계국가의 문화적 차원에서도 남다른 프라이드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주로부터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지만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을 향한 그의 열정을 보아 그는 자기민족의 구원의 소망에 대해 남다른 관심과 열정을 갖고 있었다.

 

바울은 자신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들어 그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이 버림을 받지 않았음을 증거하고 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버리실 것이라면 애당초 애굽에서부터 그들을 구원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 모세가 그들을 이끌고 가나안을 향하였을 때 믿음으로 열악한 환경을 이기지 못하고 불평불만을 하며 다시 애굽의 종살이로 돌아가고자 하는 유대인을 향하여 분노하시며 이들을 모두 멸하고 모세로 하여 새로운 민족의 시작을 하자고 하셨을 때 모세는 여호와 앞에 엎드려 만약 주께서 이들을 멸하시면 이방들이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익히 가나안 따응로 들일 수 없음이라 할 것인즉 참으소서 하고 중보하였다,

 

그때도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종살이를 하던 그들이 광야에서 죽을 때까지 기다리시고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로 하여 애굽의 종살이를 체험하지 못한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구원의 역사이지만 그들의 역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에 들어 가기를 소망하는 우리를 향한 메시지임이 틀림없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리의 거울이라고 전하였다. 그렇다면 오늘 바울의 설교는 결국 택하심과 버리심 가운데 예정된 하나님의 긍휼하신 사랑과 지혜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9장부터 11장까지의 이스라엘에 대한 바울의 변론을 들을 때 우리는 그 속에 담겨있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여야 할 것이다.

 

바울은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11장 본문 맨 뒷절에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효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롬11:33-35) 말하고 있다, 이것은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우매함을 한탄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기가 배우고 터득한 그 지식과 자신이 경험한 그 테두리 안에서 모든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사람에 따라서 앞날에 대한 예지를 갖고 있지만 그 모든 범위 역시 각 사람을 섭리하신 하나님의 예정 범위를 벗어 날 수 없다,

 

이로하여 바울은 “이는 만물이 주에게로 나오소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세세토록 있으리로다. 아멘”으로 찬송을 한 것이다. 계시록 4장을 보면 하늘 보좌에 둘러선 24장로들이 자기들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우리 주 하나님이시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고 오직 모든 능력과 영광을 주께 돌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은 택하신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증명하기 위하여 과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송사하던 엘리야를 불러내었다. 그 당시 유대민족은 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북이스라엘은 아합이 다스리고 있었다, 아합의 아내 이세벨은 이방여인으로서 종교성이 강하여 바알신을 들여와 산당을 짓고 이스라엘의 국가적 신앙으로 만들고자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양성하여 이스라엘 속에 자리잡고 있던 유일신 여호와를 말살정책을 폈다.

 

이 때 하나님의 종 엘리야가 여호와를 대적하는 이방신 선지자들을 갈멜산에 모아 하나님의 신과 그들의 신과 경합대회를 개최하였다. 왕과 궁내 대신들을 총망라한 국가적 행사였으므로 참으로 볼만한 종교행사가 아닐 수 없다.

 

사백여명의 바알 선지자들이 아침부터 제물을 잡아 벌려 놓고 북치고 장구치며 온갖 주술과 춤을 추며 제사를 드려도 그들의 신은 왠일인지 꼼짝을 하지 않고 있었다. 정오가 되도록 아무런 기척이 없자 엘리야는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였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이지…”라고 조롱하였다., 참으로 흥미진진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약이 바짝 오른 그들이 칼과 창으로 자기 몸에 상처를 내며 가신들의 종교의식을 거행하였지만 그들의 신은 저녁이 되도록 아무런 기별이 없었다.

 

더 이상 기다릴 필요 없는 엘리야는 백성을 향하여 내게로 가까이 와서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라고 외쳤다. 엘리야는 야곱의 열두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제단을 수축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제단을 쌓고 송아지 각을 떠서 나무 위에 올리고 그 나무 위에 물을 가득 부어 번제단 가장자리에 물도랑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하나님이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되심을 응답하여 주소서 하고 기도하였다. 그러자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도랑의 물까지 핥아버렸다. 이것은 실로 불가능한 일이다. 물에 젖은 번제물과 나무를 태웠다는 것은 이 불이 세상의 원리에 적용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결국 엘리야의 단 한번의 기도로 신들의 경합대회는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고 왕앞에서의 약속대로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들을 모두 기손강 가에 끌어다가 목을 쳐 버렸다, 이 얼마나 신나는 장관이였겠는가? 오늘날 이러한 일일 일어난다면 이것은 세계 가장 톱픽 기사가 아닐 수 없다.

 

그 일로 하여 아합의 처 이세벨은 분노하여 내일 오정 안으로 네 목숨이 네가 죽인 자들처럼 되리라고 이를 갈자 그 소리를 들은 엘리야는 의기소침하여 갈멜산을 향하여 도망을 가고만다. 여자의 호령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사백여명의 바알 제사장들을 죽이고 왕앞에서 달려 갈 정도의 능력을 발휘하였던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가 복중의 개 모습이 되어 꼬리를 사라고 있는 모양이라니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산에 오르기 위해 사십일간을 굶주리며 어느 동굴에 들어가 이세벨을 피하고 있을 때 주께서 그에게 물었다. 엘리아야 네가 어찌 이곳에 있느냐? 그 때 그는 “주여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였더니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선지자들을 죽이며 오직 나만 남았는데 나의 생명까지도 찾고 있습니다”라고 하소연 하였다.

 

참으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선지자 답지 못한 대답이다. 지금의 그의 모습에서는 사단에게 힘을 쓰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연약하고 처절한 인간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칠천인을 남겨 두었다”(열상19:18) 고 하셨다.

 

. 엘리야가 주의 부르심을 받은 선자자로서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인간으로는 할 수 없는 이사와 기사를 행하였다 하드라도 목숨의 위협 앞에는 두려워할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들이다. 그것은 인간은 한계속에 있어 전체를 볼 수 없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모든 만물은 소멸하는 한계성에 존속된 피조물임과 그를 지으신 하나님은 영원하며 무소부재하심을 깨달아야 한다.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그의 계획하심을 몰라 어느 한쪽 만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남을 비판하고 송사한다. 교회들 역시 자신들의 입장만을 내세우기 일수이며 오로지 자기 교회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자기의 방법으로 그 무엇을 하려고 달려 가게 된다. 바울은 로마서 10장 3절에서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였다.

 

지금 우리도 자기들의 방법만을 고집하고 전도집회다, 새벽기도회다, 금식이다 철야기도회다 하며 자신들의 의를 세우려고 전전 긍긍한다. 그러는 동안 유대인들은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다. 그런데도 지금 당신과 나는 그들을 비판하며 그들의 어리석음을 손가락질하며 스스로 그들과 똑 같은 일들을 하고 있지 않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사실 과거 아합의 시대에 이세벨이 들여온 이방신에 미혹된 이스라엘은 산에 올라 춤추고 북치며 별별짓들을 다해왔다. 그런데 요즘 기도원이라는 곳에서도 그와 똑같은 일들을 하는 곳들이 너무 많다... (너무 길어서 다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