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에베소서강해

(에베소서1:2) 은혜와 평강

이요나 2007. 2. 28. 10:34

(에베소서1:2) 은혜와 평강

 

(엡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004 신년 첫날 우리에게 임한 그리스도의 첫 메시지는 '은혜와 평강'입니다. 나는 오늘 이 메시지를 받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의 심령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오는 '은혜와 평강'이 임할 것을 믿습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에게 전달되는 '은혜와 평강"의 발원지와 또 누구를 통하여 온 것이며 또'은혜와 평강'이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에게 '은혜와 평강'을 주신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은혜와 평강의 메신져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서두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 하노니"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전하는 메신져가 누구인가를 밝히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는 "은혜와 평강'을 받는데 메신져가 왜 중요하겠느냐 말하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우리에게 임한 메시지가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아주 커다란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911사태 이후 미국 각처에는 발신자 불명의 우편물 속에 탄저균이 배포되어 수많은 인명의 피해를 보았습니다. 또한 최근 우리 주변에는 부모의 친구를 사칭하며 어린 아이들에게 접근하여 유괴를 시도하는 일들이 종종 일어 나고 있습니다.

 

'사도'(파라클레토스)란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세우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미리 아신 자들을 부르셔서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계시의 복음을 위탁하여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주의 증인들입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로 오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할 것이라"(요15:26,27) 하셨습니다.

 

사도요한은 "이 생명이 나타나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자니라"(요일1:2)증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사도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얼마나 탐스럽고 먹을 만한 것이라해도 우리는 결단코 물리쳐야만 합니다.

 

은혜와 평강의 수신자

바울은 '은혜와 평강'의 수신자를 '에베소 성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라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성도'(Seints)는 '구별된 자', '거룩한 무리들'이란 뜻입니다. 또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신실한 자들'에게 이 메세지를 전하였습니다. 신실하다는 의미는 꾸밈과 거짓이 없는 믿음의 성도를 말합니다. 만약 당신이 거룩치 않고 신실치 못하다면 은혜와 평강의 메시지와 아무 상관이 없게 됩니다.

 

'은혜와 평강'의 기원은 바울만이 아니라 사도들의 서신에 나타난 문안의 근간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을 것을 기원하였으며,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자들과 예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신실한 형제들'에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을 것을 기원하였습니다. 이와같이 바울은 이방에 세워진 모든 교회에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였습니다.

 

또한 바울의 기원은 교회뿐이 아니라 개인적인 서신에서도 발견되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와 디도에게 그리고 '동역자 된 자매 압비아와 함께 군사된 아킵보와 그의 가정교회'(빌:2)에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1장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전1:2) 축원하였습니다.

 

또한 사도요한은 '진리와 사랑 가운데 있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에게' (요한2서)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할 것을 기원하였으며, 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이암아 은혜와 평강이 있을 것을 기원하였습니다. 이처럼 은혜와 평강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도들과 그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사역자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축복인 것입니다.

 

은혜와 평강의 발신자

바울 사도는 그의 모든 서신에서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면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라고 서술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전해 줄 '은혜와 평강'의 발신처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하나님 우리 아버지 주 예수 그리스도'란 아주 기초적인 지식이지만 우리는 바울이 소개한 발신자들에 대하여 관심을 갖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즉 '엘로힘'이란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천지만물의 창조자이시며 주권자의 총체적 권위의 호칭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대통령이란 직위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히브리어 '엘로힘'은 전능과 권세를 나타나는 명사 '엘'과 복수어미 'im'이 합쳐진 복합어로서 호칭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이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창조자이시며 권능자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2절에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라 하였고 3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 기록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것은 성경이 증명하는 진실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며 이보다 더 큰 영광과 위로의 말씀은 없습니다.

 

두번째로 바울 사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주'(퀴리오스)는 히브리어의 '아도나이'와 같이 창조자이신 하나님과 주종관계를 갖은 자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호칭으로 구속과 전적 소유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또한 '예수'는 히브리어 '예수아', '여호수아'에서 비롯된 것으로 '구원자'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예수'라는 단어 앞에 '주'라는 관계를 먼저 언급한 것은 구원자이신 '예수의 구속'을 통한 주종관계가 먼저 수립되어야 함을 의미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구약의 '메시야'의 헬라어역으로서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적관계를 통한 사역적 직위를 설명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라"(요3:34) 하였으며,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으면 아무도 그를 가르 칠 필요가 없다 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영이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와 평강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은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은혜'(charis)란 '선물'이라는 의미와 아름다운 최고의 매력(charm)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물은 받을만한 행위의 댓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물을 주는 사람의 주권적 의지와 선물을 받는 사람의 관계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한 이유는 바울은 먼저 하나님의 양자됨을 언급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어떠한 일을 하고 그 댓가로 무엇을 받았다면 그것은 선물도 아니고 은혜도 아닙니다. 그러나 전혀 선물을 받을 만한 일도 하지 않았고 받을 만한 자격도 없는데 감당할 수 없는 선물을 받았다면 그것은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를 받은 것은 오직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온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 사용된 '평강'(에이레네)은 유대인의 이상적 덕목인 히브리어 '살롬'의 헬라어 번역으로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들에게 주신 영육간의 평안함입니다. 평강은 속죄함을 받은 영혼 속에 비친 하나님의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끼치노라" 하셨으므로 하나님의 평안은 그가 아니면 우리에게 올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계속하여 "내가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하셨습니다.

 

때로는 물질이나 권세로 일시적인 평안을 갖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근심과 두려움으로부터 온전하게 우리를 지켜 주지 못합니다. 세상의 것은 모두 지나가는 그림자와 같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온전한 평안을 주지 못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분명하게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주께서 말씀하신 평안이 우리의 심령의 만족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평안하다고 말하여 평안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하셨습니다.

 

근심과 두려움은 삶 가운데 발생한 문제들을 언급한 것입니다. 물질이나 세상의 방법으로 이 문제를 일시적으로 해결할 수는 있겠으나 가장 좋은 방법은 근심이나 두려움이 발생치 않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또 발생하드라도 이미 성도에게 주신 각양각색 은사를 통하여 그 문제들을 해결한다면 우리가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

 

평안은 오직 하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야고보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 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7)하였습니다. 성경은 '은혜와 평강'의 기원을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인 그리스도인의 각양각색의 매력도 '평안'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전쟁과 질병과 기근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기 힘든 세상에서 바울 사도가 전해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무엇을 근심하고 걱정하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평강을 따라 주신 신령한 복에 대하여 살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