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2:3) 비밀한 지혜와 지식
(골2: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며칠전 한기총 산하 각 교단 대표들을 중심으로 서울 시청 앞에서 10만명이 모이는 대형 시국집회가 열렸습니다. 국가적으로 어려운 때에 교회까지 들고 일어나 정권을 향한 도전을 하는 것 같아서 서글픈 마음이 들었습니다. 더우기 이 일은 지난 주 KBS국영 방송 텔리비전에서 한국 선교 120년이라는 타이틀로 개신교내의 비리를 향한 포문을 연 직후에 일어나 세인들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나는 이 집회 보도를 보면서 KBS에서 파헤친 사건들이 사실이건데 소경 개천 나무래서 무엇하냐 생각되었습니다만. 그러나 한 가지 나를 본노케 한 것은 국영방송인 KBS의 의도였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한달 전 한국 개신교 각 단체의 수장들이 모여 현 정부 출범과 함께 제시한 국가 보안법 폐지와 친일파 과거사 척결로 하여 국론이 분열되고 국가 경제에 위험을 초래하는 상태에 이르러 나라의 장래를 염려하는 성도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시국선언을 한바 있었습니다.
만약 개신교 단체가 현 정권이 내놓은 현안에 침묵내지 찬성의 표를 던졌다면 KBS는 결코 이런 프로그램을 제작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방송 내용을 보면 한국의 개신교의 전신인 평양에서부터의 출발과 함께 한국교회가 한국 개화에 미친 영향을 담아 교회가 민주주의 개혁에 앞장 선 것 같은 내용을 보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어서 일본제국 주의 시대에 신사참배와 아울러 전쟁을 돕기 위한 항공기 2대를 헌납하는 굴욕적인 모습을 담았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대한민국의 독립 후 이승만 독재정권을 재창출하기 위한 개신교 단체의 이름이 박힌 포스타를 보였고 전두환 정권을 비호하는 듯한 조찬 기도회의 모습을 세밀히 소개하였습니다. 이것을 국영방송 텔레비전을 통하여 보는 우리의 마음은 비통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닌 역사를 생각해 볼 때 이 민족 그 누가 역사의 그 흐름을 거스려 정사와 권세에 대항하며 살아갈 수 있었겠습니까?
물론 해외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한 후예들이 있었습니다만 이 나라 국민의 대부분은 어떤 굴욕을 받더라도 생명을 지켜 후세를 도모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흐르는 한강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오늘 이러한 방송을 제작한 KBS도 그 권세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러한 프로그램을 제작한 사람들의 선조들도 모두 굴욕의 밥을 먹고 생존해 왔습니다.
그런데 민주화 태동의 한 세기를 모두 부정하고 마치 공산당 인민재판을 하듯이 역사를 심판하자는 이들의 생각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그 저의가 심히 두려워집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KBS의 카메라는 한국교회의 중추 심장부를 파헤쳐 각 교회의 비리들을 들추어내었습니다.
물론 보도의 내용은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은 교회내의 비리들이었습니다. 목회자 세습 문제, 목회자 윤리문제, 교회 재정의 의혹과 초호화 대형교회 건축과 관련된 비리들,,,정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여 진리의 복음을 전파할 사명을 가진 교회로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사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교회는 그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각 사람마다의 행위에 대해 판단을 받을 것이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주인 되시는 예수께서 그 교회가 행한 모든 것에 대하여 분명한 책임을 물을 것이며 그에 응당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이번 KBS의 방송의 처사는 교회가 국가와 사회에 악한 영향을 미친 것이 없는 각 교회의 비리를 마치 각 사람의 가죽을 벗겨서 오장육부를 모두 들쳐 내어 심판대에 올려놓는 것과 같은 이성을 잃은 처사였습니다. 이것이 개신교를 향한 보복성 탄압이 아니었다면 불교와 유교와 천주교와 그 외의 모든 종교 범주에 든 비리들을 함께 다루어야 했을 것입니다.
KBS의 프로그램을 보면서 세계 최대 선교사 파송국이며 국민의 사분의 일인 일천이백만 성도를 자랑하는 한국교회가 이처럼 비통한 일로 사회적 고발을 당하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에 대하여 울분이 솟아 올랐습니다.
물론 한때나마 우리나라에서 목회자들은 최고의 존경받는 선망의 직업으로 꼽혀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교회는 세상에서 손꼬락질을 받으며 교인들마저도 자신이 신도임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시대가 올 것을 예언하여 성경은 이미 "누구든지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8:38) 기록하였습니다.
아마 하늘에 계신 주께도 통탄해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이 문제와 관련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이처럼 비통한 위치에 서야만 했을까 그 원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지혜와 지식의 보화
골로새 2장은 현대문명과 물질문명 속에서 경쟁력을 잃고 세상 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며 믿음생활을 지키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위로와 용기의 말씀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1절에서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하였습니다.
이글은 골로새와 히에라볼리 그리고 라오디게아 지역에 있는 교회에 공동으로 전해진 편지입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이 세지역은 서로 10k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이 내용으로보아 이 세지역의 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들은 아니지만 바울과 깊은 관계가 있는 교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바울 사도는 로마 감옥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로마 감옥에서 세 교회의 지도자이며 제자인 에바브라에게서 이 지역에 처한 문제들을 보고 받았을 것입니다. 자식과 같이 사랑하는 제자로부터 제가가 세운 교회가 처한 상황을 들으며 그곳을 방문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바울로서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앞에서 바울이 개척한 고린도 교회에 대하여 바울이 어떻게 책망을 하였는가를 살펴 보았습니다. 그러나 출가하여 가정을 세운 자식의 저녀들에 문제가 발생하였다면 그 아비의 마음은 정말 더 애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해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하였습니다. 그러나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로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더우기 그들의 문제는 재정적인 것도 질병에 관한 문제도 아니고 주변 정세 가운데 영적혼란을 일으킨 신학적인 문제였다고 했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주께 기도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는 주께 기도하여 그들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지혜의 말씀을 받기 위하여 힘을 썼을 것입니다.
2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힘쓰고 있는 기도를 달성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몇가지 당부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함이라"하였습니다.
마음의 용기
먼저 바울은 '마음의 위로'를 받기를 권고하였습니다. 여기서 '마음에 위안'이란 단어는 권고와 용기를 의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것으로 골로새를 비롯한 그 지역 사람들이 지식적인 곤핍에 이르러 그들을 공격하는 신학적인 논쟁으로 마음에 상처를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두번째로 바울은 '사랑 안에서 연합'하기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성도들이 하나가 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지난번 KBS 방송을 본 성도들과 해당 교회 성도들은 정말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사실 오늘 개신교의 내부적인 비리를 파헤쳐 들쳐낸 것은 외부적인 비판을 받게하려는 의도보다는 이러한 점을 노려서 성도간에 서로 불화를 조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국보법과 과거사 척결, 그리고 서울이전의 문제와 같이 국민의 마음을 분열시키기 위한 악한 영들의 책략인 것입니다.
원만한 이해
세번째로 바울은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기를 당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원만한 이해'란 주어진 상황에 대하여 분변하고 판단 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할 때 당황하여 옳고 그름의 비판적 이해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어진 상황에 당황하지 말고 조금만 깊게 생각한다면 그 모든 일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계획을 발견하게 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공격하는 이론을 필 때 그 말들을 듣지 않으려고 말을 막던가 피하려고 합니다. 특히 이단적 사설을 갖고 다가오는 사람들에게는 마주 하지도 않으려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과 분변할 수 있는 지식과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온전한 지식을 갖추었다면 그들을 두려워 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사실 그들을 피하려는 것은 그들이 갖고 있는 잘못된 지식에 두려워 그들에게 유혹을 당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천국비밀을 말씀하시며 '너희가 무엇을 들을 것인가 스스로 삼가하라'하셨고 또 누가는 동일한 문단에서 '너희가 어떻게 들을 것인가 스스로 삼가라'하였습니다.
이 말씀들은 복음의 메시지와 관련한 대한 성도의 태도를 언급하신 것입니다. 또 '누가복음 17장1절에는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가르치는 자들의 지식에 관한 말씀입니다.
만약 대학을 나온 당신에게 중학교 3학년 학생이 무엇인가 묻고져 하였을 때 최고의 학문을 가진 당신이라면 능히 그의 질문과 부족하고 잘못된 인식들을 바로 잡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지식을 갖추지 못하고 다만 대학교 졸업증만을 갖고 있다면 당신은 중학교 학생이라도 망신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지혜와 지식
바울은 3절에서 그 안에 감추어진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여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하였습니다. 여기서 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소피아'이고 지식은 '그노시스'입니다. 바로 그 당시 헬라 철학자들이 자랑삼던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소피아)는 신적 지혜와 인간의 지혜 그 모두를 포함한 것으로 '어떤 상활을 해결할 수 있는 터득한 진리를 굳게 간직하고 정진하는 힘'을 말하며 지식(그노시스)는 '진리를 이해 할 수 있는 힘'을 말합니다. 따라서 지식은 어떤 것을 알 수 있는 힘을 축적한 것이고 지혜는 그것을 활용하여 진취적인 발전을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바울이 이러한 단어를 사용하여 말하는 이유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는 것은 지혜와 지식과 관계 된 것이 아닌것 처럼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도 많은 크리스챤들이 예수를 믿는 것은 천당행 티켓을 따기 위한 것과 또 믿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축복과 악으로부터의 지키심이라는 종교적 속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다"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지혜(소피아)나 지식(그노시스) 뿐이 아니라 모든 보화들이 비밀스럽게 감추어 있다는 새로운 지식을 알려 준 것입니다. 여기서 '감취어'란 말은 '비밀'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모든 보화가 그리스도인만을 위해 비밀스럽게 감추어있다는 말씀입니다.
규모와 견고함
바울은 비밀하게 감추어진 이유에 말하여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공교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4절)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공교한 말'이란 설득력 있는 대화를 의미는 말로서 우리를 유혹하려는 무리들이 얼마나 설득력 있고 집요한 자들인가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논쟁을 일삼고 남을 넘어뜨리고자 하는 사람들일 수록 그들의 말은 매우 조리 있고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그의 보내심을 받은 사도로부터 가르침과 훈련을 받은 제자들과 함께 하였다면 어떤 걱정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5절에서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의 규모와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의 굳은 것을 기쁘게 봄이라"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주변의 이단자들의 괴변적 지식에 위축되어 얼마나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럴 때 대지식가이며 변론가인 바울사도라도 함께 있다면 능히 그들을 단번에 물리 칠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규모'(taxis)란 계급을 의미하는 군대 용어로서 질서 안에서 정리 정돈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한 '믿음의 굳은 것(stereoma)'이라는 말은 '견고함'을 의미하는 용어로서 '방파제'나 '밀집부대'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머리인 그리스도로부터 연결된 균형과 질서를 갖춘 군대와 같아서 그 누구도 대항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상고해 볼 때 골로새 성도들의 걱정은 위축된 그들의 마음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영적 규모와 그리스도 안에 굳은 믿음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들이 비록 아직 충만한 지식에 이르지 못하였다 하드라도 아무도 그들을 넘어 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주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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